사막투어를 향해 가는 끝도 없는 길에서 지쳐버리다
장맛비가 이렇게 몇 날 며칠 몇 주씩 지속되는 것도 참 낯선 일이다. 연초에는 다들 나름 멋진 2020년이 되리라 추운 새벽에 롱 패딩 입고 산에 올라가 해맞이하며 기원했을 것인데 이렇게 코로나 19라는 변수가 생겨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팬데믹으로 전 세계 이렇게 패닉 상태에 빠질 거라 누가 예측이라도 했을까.
사람에게 평생 누릴 수 있는 삶은 한정되어 있고 그 속에서 세계 100여 개국 여행하며 책 까지 내거나 여행작가로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남들 평생 가야 그 절반이나 돌아다닐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에서 길면 100년인데 그들은 그 한정된 시간을 최대한 이용하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여행 대표카페 '유랑'에는 여행 못가 우울증 걸리겠다는 사람들로 수두룩하다. 서로를 위로하며 미래를 낙관적으로 점춰보며 과거 여행사진 올리며 그때를 추억하고 공유하고 있지만 다시 자유롭게 이전처럼 외국을 언제 가게 될지 알 수 없게 되었고 가게 되더라도 많은 제약이 따르고 동양인에 대한 의심스러운 시선 또한 불편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추억이 되어버린 과거 여행의 기억이 요즘따라 새록새록 솟아오른다.
2016년 남편이 두바이 파견 근무할 당시였다. 남편도 만날 겸 여름휴가를 두바이와 런던에서 보낼 계획을 세웠다. 남편은 상당히 이코노믹 사피엔스라 경비를 절감할 목적이었는지 몰라도 두바이에서 이틀을 보내고 난 후 나와 아이들만 런던에서 보내고 오라는 것이다. 그래도 되냐 했지만 사실 너무 신났다. 26살 회사에서 공짜로 보내준 유럽 패키지로 점만 찍고 온 런던을 20년 만에 초등학생 두 딸들과 가게 된 것이다. 런던을 향한 중간 경유지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틀을 그렇게 두바이에서 보내게 되었다.
난생처음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을 타고 두바이에 도착했다. 공항 여권 검사대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흰색 칸두라를 입고 근무하고 있었다. 그 복장에 샌들이 정통 국내 상류층의 모습이라고 한다. 여자들의 니캅이나 차도르는 같은 검은색이어도 수가 놓아진 것도 있고 옷감의 재질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공항 검색대의 젊은 남자는 하얀 얼굴에 상당히 미남형이었으나 그 눈빛은 상당히 당당함과 오만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내 여권에 도장만 찍으면 되었지 뒷면 여백란을 휘리릭 넘겨보며 날 흘깃 보는 것이다. 낯선 동양 여자가 아이들 데리고 어디 어디 다녔나 하는 단순한 개인적인 호기심이었을 것이라 생각되어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 했다.
40도를 육박하는 그곳의 더위는 숨 막히고 대낮엔 도로를 도저히 걸어 다닐 수가 없다. 대낮엔 태양이 이글거리다가 저녁때쯤엔 사라져도 그 더위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삶에서 에어컨은 필수고 가정집과 모든 실내엔 에어컨 없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물가도 비싸고 현지인들은 전부 사무직군에 종사하고 제3국 사람들이 와서 현지 택시기사, 종업원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사막을 헤매던 가난한 민족이 1960년대 석유개발로 부자나라가 되었고 정부에서는 현지 학생들을 외국으로 유학도 보내준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잠시 눈을 붙이고 다음날 일찍 두바이몰로 향했다. 두바이몰은 세계 최대의 쇼핑센터로 크기가 축구장 200개 합친 면적이라고 한다. 1,200개가 넘는 매장과 백화점이 두 군데나 있으니 하루 종일 그곳에서 아이쇼핑하는 것도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쿠아리움도 있다. 바로 근처엔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바이 분수쇼를 저녁때쯤 멋진 음악과 함께 감상할 수 있고 두바이몰 지하를 통해 브르즈칼리파까지 올라갈 수 있다. 성인 1인이 브루즈 칼리파에 올라가는 비용은 상당히 비쌌다. 두바이몰 안에서 식사를 하며 여기저기 구경하다 오후에 우리를 사막투어 할 차를 기다렸다. 많은 시간을 두바이몰에서 대기하면서 오며 가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남성이 여러 명의 여성들과 함께 쇼핑하는 경우가 많았다. 돈은 많은데 쓸데가 없으니 여성들은 귀금속이나 속옷에 돈을 많이 쓴다고 한다. 참 특이한 건 화장실 비데였다. 쇠로 된 물청소용 호스와 흡사했다. 지루하리만큼 많은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사막투어로 안내할 기사가 나타났다.
사막투어는 4륜 구동차를 타고 모래사막을 질주하는데 모래언덕 위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관광객들에게 극한의 쓰릴을 안겨준다. 옵션으로 낙타를 탈 수도 있고 물담배도 피울 수 있고, 그곳에서 나눠주는 전통음식을 먹고 불쇼와 춤을 밤새도록 구경하는 것이다.
기사가 우리 가족을 픽업하러 왔지만 우리만 태우는 게 아니라 다른 인도인 가족도 픽업하는 거라 인도인 가족이 묵은 호텔까지 상당한 거리를 갔다. 원래 그렇게 두 가족을 태우는 건지 우리가 속은 건지 알 수 없다. 마치 택시를 합승한 느낌과도 같았다.
콘도에서 나온 인도인 가족은 아주 등치가 크고 나이가 오십 대 남편과 아내 청소년 아들 두 명이었다. 일단 두 가족을 태운 차는 아부다비를 지나가며 가도 끝이 없는 장장 4시간 이상을 가는 거 같았다. 지루하고 말도 통하지 않고 간간히 남편이 영어로 인도인과 기사와 대화를 하는데 남편의 영어도 영 신통치 않았고 동남아시아인의 영어 발음처럼 느껴졌다. 인도인 남성은 상당히 흥에 겨운 듯 기분이 한창 업그레이드된 상태였고 부인과 자녀들은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와 우리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편의점에 한번 들렀는데, 그곳 현지인들은 돈이 많아서 제3국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크다고 한다. 편의점에서 줄을 설 때도 줄은 의미가 없었다. 현지인들이 나중에 물건을 골라도 먼저 계산이 되었다. 암묵적인 현실이었다. 한마디로 현지인의 새치기는 당연한 것으로 제3국인들이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장시간 가다 보니 해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진짜 우리가 가는 게 맞는 건가 사막에 버려지는 건가, 이러다 납치되는 건 아닌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사막투어고 뭐고 그냥 호텔 가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결국 시간이 흘러 도착하게 되었고 많은 사륜구동 차들이 주차해 있었다.
끝도 없는 망망한 사막 한복판에 커다랗고 원형의 전통가옥의 형태를 갖춘 세트장이 있고 그곳에서 과거 그 민족들의 전통 의상을 입어보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었다. 그곳에선 음식도 나눠주고 물담배도 피울 수 있고 불쇼가 진행되는데 별 헤이는 어두운 밤이 되어버렸다. 사막투어 패키지가 있어서 각 업체별 여행객을 자신들의 차로 실어나르는터라 가보니 우리 같은 관광객 수가 꽤 많았다.
두 가족은 다른 모래언덕을 탈 수 있는 전용 차로 옮겨 탔다. 차는 일부러 재밌게 하기 위해 가파른 모래언덕 위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난리를 쳤으나 나의 마음은 이미 지치고 몸이 여기저기 흔들어대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놀이동산에서 공중으로 올려졌다 이리저리 흔드는데 무서움을 이기려고 애써 평온한 채 무덤덤한 채 기계에 몸을 맡기고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것과 같았다. 옆의 인도인 가족은 신나서 야홋 소리치고 아주 난리가 아니었다. 그건 아마 그들이 그 차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우리는 뒷자리에 타서 더더욱 내가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게 끝난 후 낙타 체험도 하라고 옆에서 호객행위를 했으나 한참 메르스로 난리가 난 터라 낙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모래 위 깔린 테이블에 앉아서 물담배를 피우는 여행자도 있었고 다들 빈 테이블을 찾아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사막에 불쇼는 그곳의 열기를 더욱 후끈후끈하게 달궜다. 불쇼가 끝나자 배꼽을 드러낸 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나와 벨리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음식을 줄을 서서 받아와 먹을 때 모래를 먹는 건지 음식을 먹는 건지 얼른 이 쇼가 끝나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고 어둠이 완전히 깔리자 우리를 태워다 준 기사도 보이지 않았고 찾을 수도 없었다. 이러다가 영영 사막에 갇혀있는 거 아니냐고 남편한테 호들갑 떨다가 남편의 왕눈썹이 흔들리며 '제발 조용히 있으세요'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난 그곳에서 우리 같은 한국인이 있나 없나 살피다가 딱 한 젊은 커플을 발견했다. 느낌상 외국에 사는 한국인처럼 보였다. 그들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즐거워 보였다. 음식을 받으려고 줄 서있는데 동양인처럼 생긴 키 큰 남자가 있어서 또 한국인이냐고 물어보니 홍콩 사람이고 나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어보았다. 암튼 설레발 날레발 치고 얼른 가자고 재촉하는 날 남편은 나무랐다. '좀 차분히 있을 수 없소?' 돌아가더라도 우리를 픽업해준 기사가 우리를 두바이몰로 데려다 주기에 그 기사가 우리를 버리고 간 게 아닌가 두리번거리며 어둠에서 난 기사의 행방을 찾는데 급급하느라 불안감에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마치 돈을 내고 기아 체험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어떻게 쇼가 끝나자 기사가 우리와 인도인 가족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지 우리 쪽으로 나타났다. 나 역시 인도인 가족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들의 행방을 쫓기 급급했다. 그렇게 저녁 10시가 다 되어 다시 두바이몰로 도착해서 분수쇼를 보기 위해 근처 식당으로 갔으나 식당에 그 어떤 자리에 앉아도 시원하지 않고 밤이 되어도 더위로 인해 숨을 쉴 수가 없었지만 참고 분수쇼를 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음악과 함께 한 분수쇼는 기억에 남을 만큼 멋진 쇼였다. 여행이란 좋은 것이 그때도 그렇게 이렇게 돌아와서도 오랜 시간 동안 기억 속에 남아 흐뭇하게 그때를 추억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기억 속의 두바이는 끝도 없는 도로를 언어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몇 시간 걸려 도착해 그곳에서 불안하게 방황하였고 어둑해져 피곤에 지쳐 돌아와 분수쇼를 본 것으로 저장되어있다. 누군가 다시 두바이를 갈 거냐고 물어본다면 그 참을 수 없는 더위 때문에 '노'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그 불안함마저도 여행의 추억이 되어 지금까지 곱씹고 있으니 여행이란 무조건 좋은 것이다이젠 굿바이 두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