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공동구매

삶에는 늘 새로운 기회가 온다

by 라블리


새로 생긴 서점과 피 튀기는 전쟁을 벌인 몇 년 동안 우리에게 남은 것은 깊은 상처뿐이었다. 그 서점이 들어오기 전까지 부모님 얼굴엔 그늘이 없었다. 책을 팔아먹고사는 일이 충분히 할 만한 일이었다. 어린 나의 기억으로 그 당시 부모님의 얼굴엔 생기가 돌았다. 바쁘고 정신없었지만 활기가 있었다. 삶이 팔딱팔딱 뛰는 듯했다.


밑지는 장사를 하며 한숨만 늘어가던 시절엔 부모님의 삶에 짙은 먹구름이 낀 듯 암울해 보였다. 어린 나에게도 그 못된 서점 아저씨가 악마처럼 보였다. 우리 아빠 엄마를 힘들게 하는 비겁하고 못된 악당. 생긴 것도 딱 그렇게 생겼었다. 아주 얄밉고 비열하게. 길고 맹렬한 폭풍우가 지나간 뒤, 우리 서점은 시름시름 앓았다. 점점 학생 수가 줄어 책 판매량도 줄어든 데다가, 이제는 할인 판매가 기본 옵션이 되었고 포인트 적립까지 해줘야 했다. 더군다나 인터넷서점이 활개를 치며 우리 서점은 점점 시들시들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든 꽃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다. 당시 난 고등학생이었다. 고등학생에게는 당연히 어마어마한 수험서가 필요한 시기. 학교에서는 주요 과목마다 참고서가 필요했다. 고2가 되어 막 참고서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에, 1학년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내게 제안을 했다. 그 친구는 2학년 때 다른 반이 되었고 그 반 반장을 맡게 되었다.


"새라야, 며칠 후에 2학년 전체 반장 모임이 있어. 내가 그때 반장들한테 제안을 해보려고. 새라네 서점에서 다 같이 문제집을 사자고. 각자 사려면 번거로우니까 너희 서점에서 한꺼번에 사면 우리도 좋고 너희 서점도 좋잖아. 어때? 내가 이야기해 볼게."


와우. 한마디로 참고서 공동구매 제안이었다. 역시 권력을 가진 자 곁에 있어야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법. 나는 이 신박한 제안을 부모님께 말씀드렸고 부모님은 그 친구에게 너무나 고마워하며 바로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문,이과 통틀어 14반의 참고서 주문을 받았고, 우리 차는 문제집을 가득 싣고 신나게 배달을 왔다. 고2~고3 내내 신나게 공동구매를 하며 우리 부모님의 얼굴엔 다시 생기가 돌았다. 엄마는 친구들에게 너무나 고마워서 책 배달을 오는 날이면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책과 함께 초콜릿을 선물로 챙겨주며 고마움 마음을 전했다. 나는 반마다 책을 배달하며 덩달아 신이 났다. 고등학교 내내 그 반장 친구에게 얼마나 고마웠던지. 다시 우릴 살게 해 줘서.


공동구매 외에도 나는 소소한 매출을 올렸다. 서점에 가기 귀찮은 친구들은 쉬는 시간 나에게 쪼르르 와서는 필요한 문제집을 주문했다. 오늘 주문하면 내일 도착하니 나는야 그 시절 인간 로켓배송이었던 셈이다. 빠르고 신속한 배송과 친절한 서비스로 개별 판매로도 적잖은 수입이 있었으니 고등학생 시절 나는 남다른 재미를 맛보았다.


인생의 모든 날들이 봄이면 좋겠다만 삶이라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냥 봄날일 줄 알았던 우리 서점에 그토록 시린 날들이 머물 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날들 또한 영원하지 않다. 어떻게든 삶에는 다시 햇살이 비추고 또 다른 봄이 찾아든다. 우리에게 새로운 봄을 선물해 준 그 친구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나도 시린 계절을 지나고 있는 누군가에게 언제든 빛을 비춰주는 사람이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