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와 무식은 비례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례함을 겪었을 때 정의의 사도 마냥 들이받고 보는 성격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집에 돌아오면, 내게는 필요하지 않은 혹을 하나 달고 온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게 무례함을 선사한 사람을 만나면, ‘무식해서 저렇구나’라는 생각을 되뇌며 신경 쓰지 않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후자의 경우가 오히려 마음이 더 편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 첫 번째 이유로는, 무례함을 겪은 그 순간보다 내 기분을 말하고 사과를 받는 과정에서 감정 소모가 더 컸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 대게 무례함을 선사한 사람은 사과도 무례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내면의 가치관을 완성하고, 이를 자양분으로 삼아 자신만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인격의 나무를 기른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나무는 훗날 비와 햇빛을 가려주는 것처럼, 인격을 갈고닦음에 있어 우리가 경험하는 교육의 질적 수준이 우리의 높이를 결정한다. 그들의 무례함을 질책하고 사과를 받는 과정도 어떻게 보면 따뜻한 물과 빛을 전하는 과정일 수도 있지만, 시들어버린 나무에 내 감정을 기여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는 것이다.
결국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다. 살다 보면 너무나도 많은 나무를 만난다.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일상을 살아내는 매 순간순간에도. 많은 나무들에 치여서 떨어지는 나뭇잎조차 싫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는 또다시 시들어버린 나무를 만나는 순간을 겪어야만 한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무식해서 저렇구나’ 정도는 외쳐 주자. 그리고 언제 만날지 모르는 거룩한 나무들을 꿈꿔보자.
내 한 몸 누이게는 큰 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충분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