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Jun 05. 2022

박사학위를 받고 난 뒤에도 삶은 끝나지 않더라

시나리오 마지막 장, 그다음 이야기

어릴 적 나는 박사학위를 받고 난 뒤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는 굳이 계획을 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학생이 아닌 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고, 그러므로 그 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는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해두었던 내 삶의 시나리오는 박사학위를 받으며 끝났다.


디펜스를 마치고, 졸업논문을 제출하고, 졸업장을 받고, 학위수여식에 참석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 일련의 과정은 폭죽처럼 한 순간에 밝게 빛나고 사그라지는 것들이 아니었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준비하고, 준비해두었던 것들을 풀어놓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보여준 것들을 정리해 다시 등 뒤에 짊어진 채 다음 장소로 떠났다. 결승선은 없었다. 길을 따라 계속 이어지는 해야 할 일들이 있을 뿐이었다. 박사과정 때 해왔던 일들은 나의 이력이 되어 내 짐을 더 무겁게 했다. 앞으로 학계에 남아있는 한 그 짐을 뒤에 남겨 두고 새롭게 시작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섬뜩했다. 그 이전에 겪었던 졸업들과는 달랐다.


연구실에서 아직 박사과정을 진행 중인 사람들이 물었다. 학위를 받고 달라진 점이 있는지 그들은 궁금해했다. 학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것을 기대했을 그들이 만족할 만한 대답은 전혀 아니었다. 분명 달라진 점들은 있었다. 이력서에 박사 학위를 추가했고, 개인정보를 기입할 때마다 이름 앞에 Dr. 를 써넣을지 잠시 고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는 인간 그 자체나 나의 삶이 크게 달라졌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졸업장에는 이제 스스로 독창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적혀있지만, 아직 더 배워야 할 점이 많다. 긴 운전교습을 마치고 면허증을 손에 쥐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혼자 운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부여받았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음 편히 도로를 공유할 수 있을 때까지는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학위를 받고 보스턴을 떠나 앤아버로 이사를 왔다. 들어보지 못했던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새가 지저귄다. 여전히 이곳이 낮일 때 한국은 밤이다. 나는 이곳에서 박사 후 과정을 시작한다. 박사 뒤에 따라오는 긴 에필로그 같은 이야기다. 박사과정 중 못다 한 일들을 매듭짓고, 독립적인 연구자로 학계로 나갈 수 있도록 그 능력을 키워주는 연수과정이다. 인생의 각 부분을 책들로 나누어 제본한다면 박사 후 과정은 그동안 써 내려가던 책의 마지막 부분이 될 것이다. 앞으로 내리는 선택 하나하나가 이번 책의 결말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것들이 다음 책의 도입부를 결정할 것이다.


물론 부담감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제부터는 세상을 조금 더 즐겨보려고 한다. 시나리오가 끝나도 삶은 여전히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인생은 내가 어릴 적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원을 떠나 사회에 나가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얻었으니 이제는 약간 더 편한 마음으로 앞으로 어떤 일들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어쩌면 이렇게 살짝이나마 긴장을 풀 수 있다는 것이 박사학위를 받고 달라진 가장 큰 점인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버스 정류장의 이방인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