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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Nov 26. 2023

끝끝내 위로 올라가는 그래프를 그려내지 못한 것에 대해

배터리 충전

일을 했을 때 성과가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바란다. 열심히 쌓아 올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결국 아래로 후드득 떨어져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현실이 어느 정도는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기를 원한다.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비록 약간 이지러졌을지라도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모아 한데 뭉치면 그럭저럭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다. 하지만 흔적도 없이 부서져버린 잔해들만이 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갈 때, 그것조차 그럴듯한 말들로 포장해 줄 수 있을 만큼 나의 시야는 넓지 않다. 배터리를 충전할 때 전압은 결국 상승해야만 한다. 끝끝내 위로 올라가는 V-t 그래프를 그려내지 못한 샘플에는 가치가 없다. 


캐소드에 있던 전자를 떼어내어 애노드로 밀어 올린다.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배터리의 경우 이 과정에서 전압이 떨어질 가능성은 없다. 현실 속 배터리의 경우, 실험을 처음 시작할 때 아주 잠시 동안 전압이 떨어지는 것은 괜찮다. 결국에는 좋아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다. 

“평형에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상을 만들고 있지만 일시적일 것이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

샘플을 직접 만든 몸이 느끼는 피로, 실험을 시작하기 전 이미 뇌를 흠뻑 적신 기대감, 내가 세운 가설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집, 그리고 아주 약간의 논리적 사고가 한데 섞인 말들로 아직까지는 나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이제 와서 포기하지 말자.” “제발.”


바닥을 치고 위로 올라가는 곡선을 그려내는 샘플들도 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들,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연구 성과 가장 위에 내 이름을 아주 잠시나마 올려놓을 수 있을 만한 것들은 좀처럼 내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를 않는다. 초당 한 번씩 찍히는 점들이 이어진 그래프는 위태롭게 흔들리기만 할 뿐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다. 새 실험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지쳤다. 스위치를 내려 실험을 중단하기에는 이 모습이 너무나도 가련하다. 실험이 끝났어야 할 시간을 한참 지났음에도 나는 위로 힘겹게 올라갔다 아래로 내리꽃히고, 또 비틀거리며 위로 올라가는 그 그래프를 계속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결국 지쳐 잠들기 전까지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기를 반복한다.


다음날 나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굳이 그것을 확인하여 나 자신을 상처 입힌다. 비틀거리다 아래로 곤두박질쳐서 전압이 0 V에 가까워진 그래프를 본다. 전해질을 뚫고 자란 리튬이 양극과 음극을 연결시켰을 것이고, 애써 밤새도록 퍼올린 전자들이 그 길을 따라 흘러나가 버렸을 것이다. 지독히도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리튬은 내가 애써 만든 방벽을 뚫어버리고 아무렇게나 자란다. 식물이 뿌리를 내려 바위를 깨뜨리는 것처럼 집요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내어 버린다. 나는 리튬을 길들일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실험실로 향해 실패해 버린 꿈 하나를 떼어낸다. 그래프를 아래로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아주 작은 결함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 일을 막는 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다. 성공으로 향하는 재현 가능한 접근법을 찾아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익명의 사람들로 가득 찬 땅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파내어 햇살 아래에 당당히 내보일 수 있다. 


나는 아직 그만두고 싶지 않다. 아직 확인해야 하는 가설들이 남아 있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성공할 것이라는 순수한 희망이 주는 에너지는 더 이상 나를 움직이게 하지 못한다.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글러브 박스에 내 팔을 집어넣게 만드는 것은 분노다. 내가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 그 자체에 대한 짜증이다. 이번만큼은 내가 만들어 바친 것에 만족하여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내려줄 수 있지 않냐는 성질부림이다.


이것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는 집착이고, 이미 오래전 뒤틀려버린 애정이다. 눈 주변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여 떨린다. 심호흡을 한다. 집중해야만 한다.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가는 불안을 아무렇게나 모아 한쪽 구석에 던져놓는다. 다시 실험을 시작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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