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정도 실력이면 많이 맵다, 많이 매워
페퍼가 이겼다. 창단하고 4년, 개막전에서 첫 승리다. 그것도 도공을 3:0 셧아웃으로 이겼다. 25:17, 25:22, 25:14. 세트 별 스코어도 완벽했다. 새롭게 출범한 장소연 호는 예전의 페퍼가 아님을 보여줬다. 이 정도면 경기 끝나고 선수들이 엉엉 울 줄 알았더니, 눈물을 찔끔 짜낸 건 오히려 나였다.
흠잡을 수 없는 경기였다. 컵대회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이한비(12득점)는 마치 한이라도 푸는 것처럼 날아다녔고 장위(12득점)는 큰 키를 이용한 신기한 이동공격을 6번 시도해 무려 5번 성공했다. 비록 속공을 7번 중 두 번 밖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하늘에서 내리 꽂는 듯한 장위표 속공은 뭔가 달랐다. 자비치(14득점)는 백어택, 퀵오픈, 오픈을 골고루 성공했고 공격종합성공률 48.15%를 기록했다. 박정아(14점)는 중간에 리시브를 연속으로 범실해 잠깐 흔들리기는 했지만(그 때 나는 아이고, 하면서 덜컥 겁이 났다) 공성률 63.64%로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공격 지점에 있는 네 선수가 14득점 혹은 12득점을 했다는 건 세터가 골고루 공을 올려줬다는 말이다. 오늘의 선수로 뽑힌 이원정이 바로 그 세터였다. 흥국생명에서는 다소 쫓기는 듯한 모습으로 특정한 선수에게만 공을 올리는 모습이었는데 완전히 달라졌다. 이건 아무래도 감독과 궁합 문제인 것 같다. 장소연 감독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듯 하지 않은가.
페퍼는 임명옥을, 도공은 박정아를 대상으로 목적타를 날렸다. 이정철이 온갖 호들갑을 떨며 장소연 감독이 임명옥에게 목적타 서브를 날리는 데는 뭔가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그리고 실제로 임명옥에게 서브가 집중되어 초반에는 80% 대의 리시브 점유율을 기록하는 중이라고 한 말 또하고 또했지만, 경기후 인터뷰에서 장 감독은 그 위치를 공격했지 임명옥 선수에게 목적타를 날린 건 아니라고 분명히 잘라 말했다. 의도적으로 몰아가는 이정철의 질문을 완벽하게 차단한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정철이 싫다. 칭찬하는 듯 하면서도 단점을 지적하고, 온갖 사후 처방문을 내리면서 대단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심지어 선수 이름을 잘못 말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배유나가 블로킹을 했는데 다른 선수 이름을 대면서 블로킹이 뭐가 잘못됐네, 어쩌네, 아유 말도 하기 싫다. 하여튼 마치 해설을 듣는 것 같은 장감독의 인터뷰가 나는 몹시도 통쾌했다. 아이고, 말이 다른 데로 샜다. 임명옥의 최종 리시브 점유율은 47.83%다.
자비치는 명성에 비해 강한 인상을 주지는 않았지만 장위는 그야말로 페퍼의 기둥이었다. 이한비와 박정아의 양 날개가 안정되고 장위가 벽을 서준다면, 그리고 이원정이 골고루 배급을 잘 하는데다가 자비치까지 올라오면(그런데 이건 뭐 사실 다른 팀도 다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글을 쓰는 게 부끄럽다) 페퍼는 쉽지 않을 상대가 될 것 같다. 지난 시즌까지는 중요한 게임에서 상대를 물고 늘어져 (예를 들어 흥국생명을 막판에 물어버린 것처럼) 조커라는 재미를 주었지만 올해는 대등한 전력으로 맞붙는 다크호스가 되어 더 큰 즐거움을 선사할 팀이 되겠다.
페퍼 선수들이 (특히 이한비) 오죽 잘 해서 경기를 이겼지만 나는 김종민이 오히려 경기를 갖다 바친 점도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수 기용에서 실패했다는 얘기다. 특정 선수 이름이 거론될 것 같아서 그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선수 기용 실패는 전적으로 감독의 책임이다.
사실 컵대회를 잘 보지 못해서 니콜로바의 활약을 놓쳤는데 오늘 보니 세터와 호흡만 잘 맞으면 무시무시한 선수가 되겠다는 느낌이다. 니콜로바에 대해서는 할 말도 많고 관심도 많은데, 오늘은 주인공이 아니니 나중에 미뤄서 해야겠다. 그나저나 페퍼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름도 핫페퍼로 바꾸면 좋겠다. 물론 농담이다. (안 웃긴 거 나도 안다)
오늘 이미지는 이한비를 모델로 했다. 왜? 나는 이한비를 흥국생명 시절부터 좋아했으니까. 물론 만들기는 미드저니 선생이 만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