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Jun 17. 2016

경복궁역 7번 출구

나나, 쇼콜라디제이, 텐더 바가 거기 있다.

첫 번째 이야기.  


- 그 집 문 닫았어요.

- 네? 그럴 리가 없어요!

- 아까도 보니까 공사 중이던데? 


삼성동 먹자골목에서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첫 번째로 좋아하는 집'이 문을 닫았다는 얘기를 누님들한테 들었다. 잠깐만요, 먹던 술잔을 내팽개치고 부리나케 현장을 확인하러 갔다. 진짜였다. 내가 첫 번째로 좋아하는 집이 나한테 말도 없이 문을 닫았던 것이다. 이럴 수는 없었다. 전화기를 뒤져 부리나케 전화를 걸었다. 그가 받았다.


- 어, 형님. 안녕하세요?

- 안녕이고 말고 어찌 된 거예요?

- 아, 가게 문 열고 4년 동안 한 번도 못 쉬어서, 이제 좀 쉬려고요.

- 뭐야, 어디든 새로 열면 꼭 연락해요. 


그게 일 년 반쯤 됐다. 그 집은 내가 삼성동에서 제일 좋아하고, 아끼고, 자랑했던 이자까야 나나였다. 다른 것도 다 좋지만 나나의 꼬치구이는 정말 일품이었다. 종종 생각날 정도로. 얼마 전 동네에서 맛도 없는 꼬치구이에 술잔을 기울이다가 문득 나나가 생각났다. 술김에 문자를 보냈다.


- 잘 지내고 있어요?

- 제가 폰이 바뀌어서… 죄송한데 누구신가요?

- 그 왜 나나에서 술 면접 보던… 


바로 전화가 왔다. 반가운 얘기는 둘째치고 여차 저차 해서 광화문에 가게를 다시 열었단다. 주소를 받고, 꼭 가마 약속을 하고… 경복궁역 7번 출구로 나와서 경찰청을 끼고 돌아 경복궁의 아침이라는 아파트 앞에 있는 나나를 찾았다. 가게는 이뻐졌고 그는 살이 빠졌고 꼬치구이는 변함없이 맛있었다. 

나나의 꼬치구이. 토마토를 안 먹는 나도 잘 먹는다. 

두 번째 이야기.


- 아빠, 초콜릿 싫어하지?

- 뭐야, 싫어해도 네가 주면 먹지.

- 근데 이 초콜릿은 싫어할 수 없을 걸?

- ㅋㅋ 술 들었다냐?

- 응, 그것도 싱글몰트래.

- 뭐! 


딸아이가 사 온, 금테를 두른 짙은 브라운 초코볼은 그야말로 쾌락의 폭탄이었다. 입 속에서 터지는 초콜릿과 아드벡의 진한 향기가 내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세상에, 이런 천국이 있다니. 아빠는 딱 좋아할 줄 알았어, 언제 꼭 같이 가자(이건 아빠 보고 돈 내라는 얘기지만 ^^), 라며 딸아이는 신나 했다. 그 뒤로 두어 번 딸아이는 위스키봉봉과 리큐르파베를 가져왔고 그때마다 나는 이런 맛이 다 있었다니, 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야, 이 집 빨리 가야겠다. 그 집이 쇼콜라디제이다. 


경복궁역 7번 출구로 나와서 경찰청을 끼고 돌아 경복궁의 아침이라는 아파트 옆, 파크팰리스 1층에 있는 쇼콜라디제이를 찾았다. 아드벡과 압상떼를 넣은 리큐르파베는 눈물 날 정도로 맛있었고 글렌파클라스 CS를 넣었다는 위스키봉봉은 호사스러움의 극치였다. 

쇼콜라디제이의 위스키봉봉. 말이 필요없다. 

세 번째 이야기.


- 사장님 어디 가셨어요?

- 네, 광화문에 새 가게를 낼 계획이라서요, 요즘 바쁘세요.

- 앗? 그래요? 


홍대에서 친구들과 술 먹다가 뻔한 이야기가 도돌이 되는 게 지겨워져 빅블루로 도망을 갔더랬다. 뻔한 술에 지친 입맛을 달래려 김렛을 주문했고 셰프였던 바텐더는 스터한 김렛을 내줬다. 김렛은 신선했지만 오너 바텐더의 김렛을 기대했던 나는 조금 실망했고 그래서 자연스레 사장님 안부를 물었던 것 같다. 


광화문에 곧 바를 연다는 소문과 달리 실제 오픈은 늦어졌고 6월 초, 가오픈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심심찮게 방문기들이 올라오고 빅블루의 느낌이 좋았던 나도 꽤 가보고 싶었다. 때마침 경복궁 근처에서 일이 있던 어느 날, 경복궁역 7번 출구로 나와 경찰청을 끼고 돌아 경복궁의 아침이라는 아파트 맞은편 나나의 옆 골목으로 들어가 바 텐더를 찾았다. 

바 텐더의 김렛. 길게 남는 쌉싸름한 여운이 일품이다

첫 잔으로 주문한 김렛은 기가 막혔고 스즈로 만든 화이트 네그로니는 쌉싸름했으며 사이드카는 우아했고 챈들러 스타일로 주문한 마지막 김렛은 달콤했다. 이른 저녁 바는 벌써 만석이었고 더 흔들리기 전에 우리는 일어섰다. 한적한 골목은 걷기 좋았고 나는 고개를 돌려 바 텐더를 다시 바라보았다. 바람이 시원했다. 


한데 묶은 이야기. 


쇼콜라디제이에서 초콜릿을 사고, 나나에서 꼬치구이에 사케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으며, 바 텐더에서 김렛, 화이트 네그로니, 사이드카, 그리고 또 김렛을 마셨다. 식사와 술과 디저트가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 이런 코스가(심지어 반경 백미터도 안되는!) 술꾼에겐 그저 낙원 이리라. 여기는 경복궁역 7번 출구다.

작가의 이전글 토마토와 네그로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