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Jul 05. 2016

칵테일 파이터

주말, 바를 향한 짧은 여행에서 술꾼이 파이터를 만나다

주말 저녁, 혼자 바를 찾아 가는 일은 마치 짧은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지는 날이면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진다. 오늘은 어떤 술을 마실까, 새로 들어온 술은 무엇이 있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혼자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기쁨도 여행 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여유 있는 날은 한두 시간 혹은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평소에 마음에 두었던 바를 찾는다. 하지만 오늘은 바에 앉는다는 행위가 더 급했다. 걸어서 십 오분 거리에 있는 친한 바에 엉덩이를 붙이고 지난 번에 봐두었던 그 칵테일을 주문한다. 깁슨이다. 펄 어니언이 들어왔다는 걸 늦게 알아서 다음에 오면 꼭 마시겠다고 했는데 용케 기억이 났다.

부드럽고 세련되고 맛있는 깁슨 by Isetta

펄 어니언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깁슨은 꽤 맛있는 칵테일이다. 마티니가 칼처럼 날카롭다면 깁슨은 새콤하고 부드럽다. 게다가 요즘엔 드라이버무스도 개성 있는 녀석들이 워낙 많아 뭘 쓰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져 더 즐겁다. (어어… 근데 이날 이세타 바텐더는 뭘 썼더라??)


원래는 두 잔만 마시고 다음 바로 떠날(!) 계획이었는데 위스키 한 잔을 더 얻어 먹고 나는 살짝 얼큰해졌다. 아무리 술꾼이래도 주량에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넘으면 다음 날 대가가 가혹한 편이어서 나름 계산을 하고 주문을 했는데 이미 한 잔을 오버한 것이다. 하지만, 글렛리벳 나두라는 내 옆에 그냥 나두라(!)고 할 만큼(이 무슨 아재 개그란 말인가. 많지도 않은 독자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ㅜㅜ) 맛있긴 했다. 물론 얻어먹는 건 물만 부은 컵라면도 맛있는 법이지만.


두 번째 바는 지하철을 타고 3개 역을 가야 한다. 하지만 살짝 오른 술기운도 꺼뜨릴 겸 나는 한 역 미리 내려 걸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오 분도 안되서 나는 후회했다. 생각보다 멀었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를 찾는 기분으로 나는 열심히 걸었고 드디어 목적지가 보였다.


뜻하지 않게 걷는 바람에 전투력을 최고로 끌어올린 나는 막 문을 연 바텐더에게 싸움이라도 하자는 듯, 싸우자 맨해튼(!)을 내달라고 청했다. 이것 역시 지난 번에 왔다가 다음에 마셔야지 하고 별렀던, 이 집, 바인하우스 대표 바텐더가 어떤 바의 대표 바텐더를 겨냥해 만들었다는 파이터급(!) 맨해튼이었다.

자, 한 번 붙어볼까. 부즈 파이터 by Bar in House

54.9도짜리 윌렛 라이에 안티카포뮬라와 푼테메스로 무장한 이 녀석의 이름은 부즈 파이터. 화끈하면서도 맛있어서 나는 그만 전투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싸우자고 시켰다가 한 대 얻어맞고 주저앉은 꼴이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 옆 손님이 주문한 올드파 슈페리어를 보고 러스티네일을 주문했고(아니 이 바텐더가 올드바틀 드람뷰이를 꺼낼 줄이야!) 요즘 몸값 오른 야마자키 12년으로 하이볼을 불렀으며(아니 이 바텐더가 산토리에서 나온 야마자키 소다를 꺼낼 줄이야!) 중간 중간 시음을 빙자해 따라 준 엄청난 위스키를 마시며 싸우다 떠들다 즐기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감당할 수 있는 주량을 넘긴 뒤였다. (술꾼이 커피를 내린 것이 바로 이 다음 날이다 https://brunch.co.kr/@soolkoon/29)

올드바틀을 물고 나온 드람뷰이 by Bar in House
뒤에 숨은 너는 누구냐, 야마자키 프리미엄 소다여

“인간 세상에는 싸움 이외의 싸움이 있어.” 야마오카 소하치가 쓴 대하소설, 대망에 나오는 말이다. (아, 물론 나처럼 칵테일과 싸우는 건 아니다!) 소설에서는 나이와 싸우는 인간의 나약함을 뜻하지만 글쎄, 술꾼은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여행을 떠나 싸움 이외의 싸움을 하고 축 늘어져 집으로 돌아온다. 몸은 늘어졌으나 승패가 없는 싸움이므로 기분은 괜찮다. 허나 언젠가는 이 나쁜 술들을 다 먹어치우리라, 술꾼은 그리 다짐한다. 구름 사이로 휘파람이 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