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바를 향한 짧은 여행에서 술꾼이 파이터를 만나다
주말 저녁, 혼자 바를 찾아 가는 일은 마치 짧은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지는 날이면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진다. 오늘은 어떤 술을 마실까, 새로 들어온 술은 무엇이 있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혼자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기쁨도 여행 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여유 있는 날은 한두 시간 혹은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평소에 마음에 두었던 바를 찾는다. 하지만 오늘은 바에 앉는다는 행위가 더 급했다. 걸어서 십 오분 거리에 있는 친한 바에 엉덩이를 붙이고 지난 번에 봐두었던 그 칵테일을 주문한다. 깁슨이다. 펄 어니언이 들어왔다는 걸 늦게 알아서 다음에 오면 꼭 마시겠다고 했는데 용케 기억이 났다.
펄 어니언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깁슨은 꽤 맛있는 칵테일이다. 마티니가 칼처럼 날카롭다면 깁슨은 새콤하고 부드럽다. 게다가 요즘엔 드라이버무스도 개성 있는 녀석들이 워낙 많아 뭘 쓰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져 더 즐겁다. (어어… 근데 이날 이세타 바텐더는 뭘 썼더라??)
원래는 두 잔만 마시고 다음 바로 떠날(!) 계획이었는데 위스키 한 잔을 더 얻어 먹고 나는 살짝 얼큰해졌다. 아무리 술꾼이래도 주량에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넘으면 다음 날 대가가 가혹한 편이어서 나름 계산을 하고 주문을 했는데 이미 한 잔을 오버한 것이다. 하지만, 글렛리벳 나두라는 내 옆에 그냥 나두라(!)고 할 만큼(이 무슨 아재 개그란 말인가. 많지도 않은 독자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ㅜㅜ) 맛있긴 했다. 물론 얻어먹는 건 물만 부은 컵라면도 맛있는 법이지만.
두 번째 바는 지하철을 타고 3개 역을 가야 한다. 하지만 살짝 오른 술기운도 꺼뜨릴 겸 나는 한 역 미리 내려 걸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오 분도 안되서 나는 후회했다. 생각보다 멀었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를 찾는 기분으로 나는 열심히 걸었고 드디어 목적지가 보였다.
뜻하지 않게 걷는 바람에 전투력을 최고로 끌어올린 나는 막 문을 연 바텐더에게 싸움이라도 하자는 듯, 싸우자 맨해튼(!)을 내달라고 청했다. 이것 역시 지난 번에 왔다가 다음에 마셔야지 하고 별렀던, 이 집, 바인하우스 대표 바텐더가 어떤 바의 대표 바텐더를 겨냥해 만들었다는 파이터급(!) 맨해튼이었다.
54.9도짜리 윌렛 라이에 안티카포뮬라와 푼테메스로 무장한 이 녀석의 이름은 부즈 파이터. 화끈하면서도 맛있어서 나는 그만 전투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싸우자고 시켰다가 한 대 얻어맞고 주저앉은 꼴이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 옆 손님이 주문한 올드파 슈페리어를 보고 러스티네일을 주문했고(아니 이 바텐더가 올드바틀 드람뷰이를 꺼낼 줄이야!) 요즘 몸값 오른 야마자키 12년으로 하이볼을 불렀으며(아니 이 바텐더가 산토리에서 나온 야마자키 소다를 꺼낼 줄이야!) 중간 중간 시음을 빙자해 따라 준 엄청난 위스키를 마시며 싸우다 떠들다 즐기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감당할 수 있는 주량을 넘긴 뒤였다. (술꾼이 커피를 내린 것이 바로 이 다음 날이다 https://brunch.co.kr/@soolkoon/29)
“인간 세상에는 싸움 이외의 싸움이 있어.” 야마오카 소하치가 쓴 대하소설, 대망에 나오는 말이다. (아, 물론 나처럼 칵테일과 싸우는 건 아니다!) 소설에서는 나이와 싸우는 인간의 나약함을 뜻하지만 글쎄, 술꾼은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여행을 떠나 싸움 이외의 싸움을 하고 축 늘어져 집으로 돌아온다. 몸은 늘어졌으나 승패가 없는 싸움이므로 기분은 괜찮다. 허나 언젠가는 이 나쁜 술들을 다 먹어치우리라, 술꾼은 그리 다짐한다. 구름 사이로 휘파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