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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Oct 16. 2016

술꾼의 친구들과 네 잔의 버번

토요일 오후, 술꾼을 찾아오는 친구가 있어 흐뭇하다 

“저기 두 번째 라인은 버번이죠?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 다 한 잔씩 줘보세요.” 


나는 언젠가 바에서 꼭 이렇게 말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요즘 웬만한 바에서 이런 주문은 꿈도 못 꾼다. 줄줄이 서 있는 그 수많은 보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흐뭇해하다가 낯선 보틀이 보이면 찔끔찔끔 하나씩 시켜 보면서, 다 줘보라고 말하고 싶은 소망을 꼭꼭 누른 채 술꾼은 살고 있다. 


반가운 술꾼 친구 두 사람이 토요일 오후 술꾼의 홈그라운드로 찾아온 날, 원래는 타코에 맥주를 마시고 낮 시간에 문을 열어주는 고마운 바 ‘배럴’에서 위스키 퍼레이드를 벌릴 계획이었다. 그런데 음식은 개성 있지만 썩 친절하지는 않은 타코 집이 무성의하게 수성펜으로 ‘오늘 쉰다’고 낙서처럼 써 놓고 문을 안 여는 바람에 점심 메뉴를 바꿔야 했다. 뭐, 갑자기 계획을 바꿔야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황할 내가 아니다. 적어도 홈 그라운드에서는 언제든 낮술을 즐길 수 있는 집들을 꿰고 있는 것, 이것이야 말로 술꾼의 기본자세 아니던가. 


‘노포’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에서 돼지 샤부샤부를 먹고 배럴로 쳐들어갔다. 일부러라도 그런 것처럼 배럴은 조용했고 술꾼 셋은 바를 독차지하고 앉아 저마다 위스키를 내놓으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역시 선수들이라 주문하는 클래스가 다르다. 이 페이스에 말리면 안 된다. 내 페이스를 잃고 틀림없이 오버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백 바를 바라보았다. 요즘 몹시 이뻐하는 바질 헤이든이 손짓을 했다. 오냐, 오늘은 너를 시작으로 버번을 달려주겠다. 바질 헤이든부터 그 옆으로 늘어선 버번을 하나씩 눈여겨보며 저는 바질 헤이든이요, 하고 외쳤다. 


나는 이쁘장한 술보다는 터프한 술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바질 헤이든은 뭐랄까 이쁘면서도 만만치 않은 그런 버번이다(아마 이름 때문에 그렇게 느낄지도 모른다. 술꾼이 맛을 알 리가 없으니 ㅋ). 이 정도면 기분 좋게 스타트를 끊었으니 다음은 놉 크릭이다. 역시 터프한 느낌이 확 온다. 이래서 버번을 마시는 게지, 그러다가 놉 크릭을 치운 뒤에 숨겨놓은 우드포드 리저브를 봤다. 이 녀석은 병이 옆으로 퍼져 있어서 사실 백 바에서 좀 손해를 본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니 한 줄 뒤에 세워두는 걸 종종 봤던 탓이다. 하긴, 차가운새벽에서는 옆으로 세워 놓았더라. 넙데데한 녀석이 그렇게 얇은 줄은 차가운새벽에서 처음 알았다. 


눈에 띈 김에 놉 크릭에 이어 우드포드 리저브를 불렀다. 아놔, 이게 이렇게 부드러울 줄이야. 예전, 바에 버번이 별로 많지 않던 시절에 온갖 우아를 떨며 마시던 녀석이긴 했는데 다른 버번들과 견주니 이렇게 말랑 말랑할 줄이야. 이거라면 몇 잔이라도 더 마시겠다 싶었지만, 버펄로 트레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참내. 말랑 말랑한 우드포드 다음에 마셔서 그런가, 이건 완전 버펄로였다. ㅋㅋ

오늘의 네 잔, 그러나 술꾼은 취하지 않았다. 

마시다가 문득 잘못했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순서대로 마실 게 아니라, 어차피 네 잔을 마실 거면 한꺼번에 주문하는 거였는데. 그래야 서로 비교하면서 재미나게 마실 수 있겠구나. 기왕이면 하루키처럼 일곱 잔을 한 번에 시켜봐야겠다. 


술꾼에게 꼭 필요한 것을 꼽으라면 어느 정도는 넉넉하게 마실 수 있는 위장과 취기를 조절할 수 있는 뇌, 그리고 다음 날 숙취를 빠른 속도로 걷어내는 해장 능력이겠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술을 마시고 즐기고 이야기하고 공감할 수 있는 친구들이다. 혼자서 마시는 술 역시 몹시도 편안하지만 친구들과 마시는 즐거움도 포기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돼지 샤부샤부로 시작한 술자리는 바 배럴에 이어 최근 경험한 중에 가장 매웠던 떡볶이 집을 지나 VOOOO에서 마무리를 했다. 후기를 듣자니 친구들은 WOOOO을 거쳐 쌀국수로 해장까지 하고 헤어진 모양이다. 졌다. 자존심은 상했으나 부러웠다. 그래서 나는 이들과 또다시 술잔을 기울일 것이다. 내가 이기는 날까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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