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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n 20. 2019

두 번의 첫 번째 민트줄렙

2년 만에 찾은 바에서 본능처럼 시킨 첫 잔이 2년 전의 그 잔이었다

바의 분위기가 약간 마음에 안 들었다. 가득 찬 손님들, 바쁘게 움직이는 바텐더들, 웅성거리는 말소리 뒤로 챙글거리는 칵테일 기구의 소음 그리고 어디선가 나는 퀴퀴한 냄새. 나는 조금 멍했다. 버릇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로, 옆에서 메뉴판을 뒤적이는 그의 여유로운 손짓을 바라보다가 문득 민트줄렙을 떠올렸다.   


“난 민트줄렙.” “어, 나도 그거랑 김렛 중에서 고민했는데!” 뭔가 통한 것 같다는 듯 씩씩한 그의 한 마디에 갑자기 기분이 민트 해졌다. '그래, 잘 골랐네.' 나는 미간을 풀었다. 눈 사이가 편안해지고 멍한 증상도 사라졌다.


얼음을 채운 칵테일 글라스가 우리 앞에 놓였다. 셰이커에 재료를 담아 뒤이어 나타난 흰 재킷을 입은 바텐더는 힘 있는 셰이킹으로 칵테일을 섞은 후 따라주었다. 잘게 부서진 얼음이 글라스 안에서 반짝였다. 그가 주문한 김렛이었다. 한 모금 머금고 그가 잔을 밀어주었다. 보태니컬의 새콤한 맛이 상쾌했다.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컵을 배경 삼은, 투명한 빨대가 담긴 오늘의 민트줄렙

내 민트줄렙이 나왔다. 하얗게 선 주석잔 위로 잘게 부순 얼음이 쌓여 있었고 민트 한 조각 머리를 들고 있었다. 빨대를 물고 오물거렸다. 얼음과 민트로 시원함을 가장한 탓인가, 버번이 생각보다 강하게 올라온다. 예상을 깨는 강렬함. 내가 민트줄렙을 좋아하는 이유다. 나는 얼음 한 조각을 꺼내 오드득 씹고 그에게 잔을 밀었다. 다른 빨대로 숨을 들이켠 그의 눈이 커졌다. '내가 이거 마실 걸.' 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괜히 신이 났다.


약간 핑크빛이 도는 바 위에 놓인 주석잔 민트줄렙을 가만히 보는데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석잔에 민트줄렙을 내주는 바는 여럿 있는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이걸 어디서 봤더라. 아, 떠올랐다. 2년 전 만취 상태로 찾아왔던 이 집 폴스타에서 나는 첫 잔으로 민트줄렙을 시켰던 것이다. 그땐 지금과 다른 이유로 민트줄렙을 시켰는데, 어쨌든 두 번 방문에 첫 잔이 모두 민트줄렙이라니. 신기했다(기억이 난 것도 포함해서).

검은 빨대가 있는 2년 전 민트줄렙

‘바에는 신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신이 민트줄렙 시키라고 꼬드겼나 보다, 생각하고 싱겁게 웃었다. 우연치고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다음번에 이 집에 와서 의도하지 않게 민트줄렙을 또 시킨다면, 나는 ‘바의 신’을 믿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두 번은 우연이어도 세 번은 필연이니까. / ray, the soolkoon


#민트줄렙 #칵테일 #우연 #폴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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