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사전투표를 앞두고, 싱크대 찬장에 붙여둔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 마지막 부분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수년 전 겨울을 수놓았던 촛불들이 떠오르고, 마음이 심란해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고. 진영과 이념을 넘어, 정치에 대한, 국민을 위한 봉사에 대한 소명을, 신념을, 책임을 조금이라도 더 갖춘 후보에게 마음이 모이길 간곡히, 간절히 바란다.
"그때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자신을 진정한 ‘신념 정치가’로 여기며 지금 이 혁명이 발산하는 열광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 되어–내적 의미에서 무엇이 ‘되어’ - 있을지를 보고 싶다. 그때 상황이 셰익스피어의 102번 소네트가 들어맞는 그런 상황이라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그때, 꽃피는 봄에 우리의 사랑은 푸르렀다. 그때 나는 그 사랑을 노래 불러 맞으려 했지. 꾀꼬리는 여름의 문턱에서 노래 부르나, 계절이 무르익음에 그 가락을 멈추더라.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지금 표면적으로 어느 집단이 승리하든 상관없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여름의 만개가 아니라 얼음이 뒤덮인 어둠과 고난에 찬 극지의 밤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황제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도 권리를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밤이 서서히 물러갈 때, 이 봄날의 꽃이 자신들을 위해 화사하게 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살아남아 있게 될까? 여러분 모두는 그때 내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을까? 비분강개해 있을까 아니면 속물근성에 빠져 세상사와 자신의 직업을 그냥 그대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또 아니면 (그리 드문 일도 아니겠지만) 그럴 재능이라도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신비주의적인 현실도피의 삶에 빠져들거나 또는 단지 그게 (흔히 있는 현상이자 뿌리 뽑기 어려운 전염성을 갖는) 유행이 되어서 그런 현실도피에 빠져들어 있을지 모른다. 어떤 경우이든 나는 그런 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고,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감당해 낼 능력도 없었으며, 일상적 존재로서도 능력이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결론 내리게 될 것이다.
이들 자신은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갖고 있다고 믿었겠지만, 그 말의 가장 깊은 내적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은 객관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갖지 못했다.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소박하고 순수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형제애나 도모하고 그저 자신의 일상적 업무에 열심히 몰두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정치란 열정과 균형적 판단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자 몇 번이고 되풀이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고 모든 역사적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지도자이면서 또한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영웅일 수밖에 없다. 지도자나 영웅은 아니라 해도, 모든 희망이 깨져도 이겨 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지금에라도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오늘날 아직 남아 있는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해 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의 마지막 중.
싱크대 찬장에 붙은 『소명으로서의 정치』 마지막 부분 발췌
짤막한 에필로그. 오늘 막간의 짬을 내어 투표를 마치고 왔다. 단지 투표를 하였을 뿐인데 무언가 울컥한 것이 내 몸 어딘가 저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하다. 투표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뭉클하고 애틋하고 짠하고 끓어오르고 울컥하고 간절할 일인가. 오늘도 쉬이 잠 못 이루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