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적는 일기

by 희량

열다섯 줄 남짓 되는 일기를 적었다. 원래 내 일기는 엄청난 강풍에 휘날리는 모양새라 본의 아니게 암호화되어 있다. 최소한 나 스스로 알아볼 필요성은 있으니, 내 일기장부터 느리게 꾸며보려 한다. 오늘의 일기부터 시작했다.


빠른 속도에 적응한 내 손가락은 느림이 어색했다. 느리게 쓰는 김에 멋도 부리고 싶은데, 마구 꼬불거리려는 펜촉을 자제하느라 진땀이 났다. 글씨체란 그래서 무섭다. 오랫동안 글씨를 써온 방식이라, 바꾸기엔 그만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덕분에 날리는 모양새는 여전하다. 그래도 나름 눌러쓴 흔적이 눈에 띈다. 또박또박 쓴 글자엔 여러 감정이 묻어난다. 손보다 앞서가는 생각을 붙잡아 들여다본 시선과, 그 시선에 흐르는 감정이 모두 담겨있다. 고작 하루의 일상을 적어본 것뿐인데, 색다른 느낌이다.


느리게 쓰다 보니, 생각을 붙잡기도 쉬웠다. 내가 빠른 속도로 적어내려갔던 건 빠른 속도로 쏟아지는 생각을 내보내기 바빴던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느리게 쓰니 흘러가는 생각을 바라볼 시간이 충분했다. 그렇게 바라보다보면, 문장을 만들어가는 와중에 솔깃한 표현들도 떠올랐다. 씹다보면 단맛을 풍기는 밥알처럼 한 문장 한 문장 곱씹는 맛이 있었다. 오늘 애인이 날 만난 게 인생 최대의 행운이라는 감지덕지한 말을 건넸는데, 애인의 말들을 떠올려 곱씹다보니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는 진부한 말의 묵직한 뜻을 실감했다'는 한 문장을 완성했다. 적고 보니 몹시 마음에 들어 흐뭇한 만족감에 몸서리 쳤다. 급기야 일기장 귀퉁이의 사진을 찍어 오늘의 베스트 문장을 공유하기까지 했다.


오늘도 빠른 하루를 보냈는데, 잠시 느린 시간에 머무를 수 있어 행복했다. 일기만큼은 느린 속도로. 장의 단맛을 곱씹으며. 아, 이게 망중한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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