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피곤하게, 왜

by 희량

『여자를 돕는 여자들』에서도 ,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에서도, 임소연 작가님이 강조하는 것은 ‘뛰어나지 않은 여성도 이공계에서 공부하거나 일하기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 잘 못하지만 그냥 가 볼까’ 하는 여성도 이공계에 진학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류밖에 안 되는 여성 연구자가 대학 정년직을 받는 것”이야말로 성 평등의 실현이라고. 과학과 공학이 남성의 영역으로 굳어졌기 때문에 여성은 노력과 실력으로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야 했던 반면, 남성은 비슷한 수준의 동료와 함께라서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고도 이공계에 머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리학을 좋아했던 여동생이 떠올랐다. 그 어떤 과목보다 물리학을 가장 좋아했다. 임소연 작가님에 따르면, 물리학은 과학의 정수와도 같은 학문으로, 그만큼 남성의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동생은 어떤 제지도 없이 물리학을 좋아했고, 공대에 진학했다. 어쩌면 여고에 다닌 덕분일 거라 생각했다. 흥미로운 가설이지 않은가. 나는 동생과 이 가설을 나누고 싶었다.


동생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성별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다며 피로감을 토로했다. 자신의 주변에서는 크게 성차를 못 느끼겠다고 덧붙였다. 답변에 섞인 불만에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 불편감은 나로 인해 비롯된 걸까? 내가 그동안 너무 공격적으로 말했던 걸까?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이었을까?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한다고 느껴졌을까?


이런 불만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의 말과 글은 누군가에게는 굳이 불필요하게 따져서 피곤하게 만드는 대화일 수 있다. 씁쓸하지만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당황스러웠던 점은 여자인 동생으로부터 거부 당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성이라면 성차에 대한 논의에 모두 동의하고 흥미를 보일 것이라고 은연 중에 일반화했던 듯하다.


그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이성 커플인 두 선배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선배가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친구분은 여자 아이에게는 파란 장난감을 주고, 남자 아이에게는 분홍 장난감을 주며 성 고정관념을 해체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펼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배는 성 역할을 굳이 거부해야 하냐며 그냥 수용하고 살면 안 되냐고 말했다. 이 선배는 여성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선배의 남자친구가 고정된 성 역할은 강요로 작동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반박했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그림이었다. 이 대화로 인해 누군가는 규범을 매번 거부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에겐 피로한 일이며, 수용은 하나의 달가운 선택지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덕분에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왜 규범을 거부하고 싶어하는가? 내가 말하고 쓰는 모든 언어의 목적은 무엇인가?


솔직하게 접근해보자면, 내가 끊임없이 말하고 쓰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인데, 이 ‘재미’는 조금 논란거리가 될 것 같다. 문제를 해결하는 고민보다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 건드리는 것이 아닌가. 부조리한 구조를 통찰해낼 수 있는 소수 중 한 명이 되었다는 일말의 뿌듯함도 있을 것이고, 논리적으로 말과 글을 구성할 수 있는 이성적인 스스로의 모습을 즐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순수한 목적이 아닌 개인적이고 허영심 가득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꾸만 고개를 드는 생각이 있다. 이런 글이라도 필요하다는 것. 완전하지 않더라도, 허영심 가득하다라도 중요하다는 것. 규범은 누군가에겐 강요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폭력이다. 외면 받는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규범의 권력은 끊임없이 들춰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 또한 자유로움을 느낀다. 아시안과 여성을 제외하면 내게는 소수자의 특징이 없다. 이성애 규범과 가족 규범, 비장애인 규범, 심지어 외모에 대한 규범에까지 어느 정도 잘 적응하고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나와는 동떨어진 것 같은 동성애를 옹호했을 때, 독특한 가족 형태를 떠올렸을 때, 일종의 위로를 느낀다. 나라는 한 개인이 이 모습 그대로 오롯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명제를 다시 되새기며, 포용의 안락함을 맛본다.


아마 피곤함을 느끼는 이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딱지처럼 오랫동안 굳어온 관습을 뜯어내는 것은 따갑고 거슬리는 일일 것이다. 굳이 반박해야 하냐고, 그냥 수용하고 살면 안 되냐는 외침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성 규범이든, 가족의 형태든, 그 안에서 괴로운 누군가가 있다면, 괴롭지 않은 사람이 유지하자고 말하는 것이 과연 중요할까? 괴로운 사람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새로운 방안을 노력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규범의 오류는 분명히 있다. 우리 사회는 인공적 토대 위에 서 있고, 그것은 불완전하다. 오랜 역사를 지나오며 형성된 것이라 해도 지금의 형태가 정답이라 확언할 수 없다. 끊임없이 더 나은 형태를 고민해야 한다면, 소외와 외면을 줄이는 방향이 옳을 것이다. 개인의 다양성을 아우르는 것은 결국 세상을 아우르는 일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