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마음, 닿는 세계

보이지 않는 마음 #1

by Run by Design



장맛비가 이어지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자연스레 지난 시간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비가 쏟아져 당장 달리러 나가진 못했지만, 같은 땅 위에 사는 농부들에겐 단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홍수 피해 소식이 들려왔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여전히 '어떻게 하면 재밌게 꾸준히 달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 문득 이런 결론에 닿았다.

“죽기 전까지, 달리기 많이 하고 죽어야지.”



지난 1년은 감사함과 부끄러움이 교차했던 시간이었다.

좋아하는 ‘달리기’를 주제로 연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행운이라 생각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감정이었다.


그 사이, ‘풀마라톤’은 내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처음 도전을 결심했을 땐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다. 15km조차 버거웠던 나에게

42.195km는 감히 상상조차 어려운 거리였다. 그저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 준비하는 마라톤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되고 외로웠다. 체력보다도 정신적으로 지치는 날이 많았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반복되는 회의 속에 흔들리던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극장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중 ‘그랜드캐니언의 두 남자’ 편이 눈에 들어왔다.

시각장애인 송경태 씨와 그의 가이드러너 송기석 씨가 함께 271km를 달리는 이야기였다.


가이드러너 송기석 님과 시각장애인 러너 송경태 님.


가이드러너 송기석 님의 모습이 특히 깊이 남았다. 자신의 컨디션도 한계였을 텐데,

단 한 번도 짜증 내지 않고 송경태 씨의 식사를 챙기고, 젖은 양말을 빨아 널고, 잠자리를 준비하는 장면들.


출처. 인간극장


거친 사막 한복판에서, 그는 늘 자신의 몸보다 파트너를 먼저 생각했고,
시각장애인 러너는 자신의 불안함을 숨기며 묵묵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도착지에 다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껴안고 엉엉 우는 모습에서야, 그들이 얼마나 버텨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말보다 묵묵히, 감정보다 행동으로, 존재 그 자체로 응원하고 있었던 사람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응원에는 여러 형태가 있고, 말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누군가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된다는 걸.

그날 이후, 내 안에서도 무언가가 조용히 시작되었다.

“그래, 나도 저런 러너가 되고 싶다.”


달리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다짐은 단순한 열정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이드러너가 되려면 풀코스를 세 번 이상 완주해야 한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 생겼다.
그래서 천천히 준비할 계획이었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꿈이 다가왔다.
풀코스는 아직 두 번밖에 달리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가까워진 건 시각장애인 러너를 위한 ‘연구’였다.

처음엔 그저 내게 영감과 동기부여를 준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러너에게 감사한 마음과

‘달리기’가 좋아서 이 주제를 선택했지만,

‘내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연구를 해도 될까?’라는 고민이 따라왔다.
나는 어디까지나 비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주제로 삼는 건 쉽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삶과 맞닿아 있다면,
그 무게만큼은 가볍게 다룰 수 없었다.

‘이 선택이 건방지진 않았을까’ 스스로에게 여러 번 물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용기를 냈다.


시작은, 무작정 시각장애인 커뮤니티에 들어가 “혹시 달리기를 하시는 분이 계실까요?”라고 글을 올렸다.

운 좋게도 답변을 주신 분이 있었고, 그날 저녁 우리는 통화했다.
상대는 감사하게도 마라톤과 달리기 경험이 풍부한 시각장애인 러너였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나는 가능성을 발견했고,
조금씩 이 연구를 도전해 봐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후 그녀는 동료 러너들을 소개해주었고,
나는 ‘가이드 러너 프로젝트’라는 커뮤니티를 알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내 발걸음은 점점 이 꿈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음 글에서는,
어떻게 이 연구 주제를 제안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고민과 설렘이 있었는지를 차근히 풀어보려 한다.

달리기를 통해 만난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배운 것들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