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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삼류 Mar 02. 2024

해변의 크레이터

 해변의 크레이터      

 선화의 목에는 이어폰이 감겨져있다. 밤새 뒤척이며 노래를 들은 탓이다. 귓가엔 여전히 멜로디가 흐르는듯하다. 무심하게 이불을 걷고 손바닥으로 침대를 누르며 상체를 일으킨다. 검지와 엄지에 끼워진 은색의 얇은 반지가 여린 손가락을 더 여리게 보이게 한다. 비릿한 냄새를 맡은 표정이 약간 일그러진다. 일어나자마자 느낀 오묘한 기분과 비릿한 공기 모든 정황이 맞아 떨어지는걸 느낀다. 침대 옆 휠체어에 힘겹게 몸을 옮기고 화장실로 향한다. 바퀴를 굴리는 선화의 어깨가 의연하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다. 새로운 팬티로 갈아입고 생리대를 팬티위에 붙인다. 갈아야 할 것은 팬티와 잠옷바지 뿐만이 아니다. 얼룩진 침대시트를 걷는다. 왼쪽 모서리에 껴버린 시트가 잘 빠지지 않자 선화는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오른쪽 눈 밑의 점이 들썩인다. 시트는 둘둘 말아 한 팔에 움켜쥔다. 바퀴를 굴리며 이불 시트까지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팔에 다 들어오지 않는 시트는 바닥에 질질 끌린다. 바퀴가 자꾸만 바닥에 끌리는 시트 밑자락을 잡는다. 이런 불편함 쯤은 익숙했다. 겨우 세탁기에 침대시트를 넣은 선화는 냉장고를 열고 자연스럽게 에스프레소가 들어있는 초콜릿을 꺼낸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방문을 열고 침대에 누워 초콜릿을 입안에 굴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부는 모양인지 낙엽이 휘날리며 떨어졌다. 나무가 자꾸 말라가는걸 보니 겨울이 시작되기까지 얼마남지 않았음을 체감했다. 입안에서 구르던 초콜릿이 녹으며 속에 들어있던 녹진한 에스프레소가 터져 나왔다.  그다지 쓰지 않았다. 30살이 되면 이런 쓴맛쯤 무감각해 지는듯했다.

 선화는 사과를 깎았다. 아침에 사과를 먹는 일은 어릴 때부터 해오던 일이다. 껍질이 벗겨진 채 통통하게 당도가 오른 가을사과에 포크를 꽂을 때 미세하게 과즙이 흘러내렸다. 선화는 사과를 크게 베어 물고 터져 나오는 과즙을 음미했다. 걱정할 일 같은 건 없었다. 슬퍼해야할 것도 없었다. 곧 겨울이 오지만 집은 따뜻할 것이며 또한 배가고파 굶어 죽을 일도 없었다. 오늘 사과를 음미하듯이 겨울이 되면 노랗게 익은 귤을 바구니에 잔뜩 담고 까먹으면 되는 것이다.

생각에 잠겨 사과를 오물거리기도 잠시. 선화는 자신에게 할 일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낙상사고 이후 병원에서 5개월간의 재활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부터는 틈틈이 엄마를 도와서 책 요약알바를 했다. 책의 내용이나 용량에 따라서 이틀이 걸릴 때도 이주가 걸리기도 하는 일이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안정이 필요한시기에 적절한일이었다. 재활이 끝난 후 바로 일을 시키는 엄마는 못돼 보일수도 있으나 엄마는 알고 있었다. 우울함에 빠질 새도 없이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고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이 세상을 버티는 방법 중에 하나라는 것을. 그녀는 선화가 버티고 이겨내길 간절하게 기도했다.

 선화는 책을 찾으러 서재로 들어왔다. 벽을 가득채운 책들은 엄마가 어릴 때부터 모은 미술관련 서적들이었다. 한권에500만원에 호가하는 서양미술책도 거침없이 사는 엄마는 미대 교수였다. 엄마는 선화가 요약할 책을 서재 한 가운데 책상에 올려놓았다. 동양미술에 관한 책이었다. 선화는 관련 있는 서적을 몇 권 더 가져가기 위해 동양미술에 관한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의 가장 위쪽으로 손을 뻗었다. 전혀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터무니없는 시도였다.  괜히 어깨만 지끈 달아올랐다. 휠체어를 오래 밀어서 어깨가 많이 아플거 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휠체어 발판에 가지런히 놓여 진 앙상한 허벅다리와 종아리 굳은살이 없는 발을 보았다. 다리만 쓸모없으면 될 일 이었다. 굳이 멀쩡한 팔까지 터무니없는 짓을 해야 하나 싶었다. 한번만 더 팔을 위로 뻗어보고 싶었으나 두 번씩이나 패배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싱크대 선반위에 엎어진 컵들은 아직 물기가 흥건하다. 파란색 꽃이 그려진 흰색의 컵 위로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있다. 개중엔 툭 떨어져 버리는 것도 있다. 선화는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냈다. 컵을 뒤집고 물을 담았다. 손잡이가 있었지만 선화는 컵의 몸통을 손으로 감쌌다. 물기 있는 컵이 손에서 미끄러져 내리더니 깨져버렸다. 휠체어를 밀던 순간에 방심했던 탓 이다.나 뒹굴어 진 컵은 물을 담던 용기에서 그저 쓸모없는 파편이 되어있었다. 이 주방엔 쓸모없는 것이 두 개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선화였다. 어쩌면 세 개 일수도 있다. 파편과 뒤섞여 쏟아져 마실 수 없는 물까지 포함한다면 그랬다. 선화는 중환자실에서 들었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낙상사고로 목이 부러져서 평생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셨습니다. 높낮이가 없는 의사의 목소리. 축 처진 그 다리로는 걸을 수 없을 테지만 나는 잘 걷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듯이 터벅터벅 걷는 검은 다리의 힘찬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의사가운이 항복을 선언하는 흰색의 수건처럼 역동적으로 휘날렸다. 한 사람의 머리위에 번개를 내 던져놓고 유유히 사라지는 그 뒷모습은 건조한 사막을 걷는 귀머거리 같았다. 천둥 같은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고 폭우처럼 내리는 눈물에도 젖지 않는 그 건조함. 대체 중력이 뭐 길래 힘을 실어 떨어져 버리고 깨져버려 쓸모를 잃어버릴까  선화는 바닥에 떨어질 걱정 없이 둥둥 우주를 떠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휠체어를 타고는 갈수 없는 곳이 많았다. 28살에 장애인이 된 선화는 걷기로 따지면 첫 걸음마를 포함해 26년 이상쯤 걸어 다녔고 걷기에 있어선 베테랑이었다. 계단을 오르고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차도와 인도사이의 턱 쯤 은 어렵지 않게 넘나드는 어른이었다. 가끔은 하이힐을 신고 각선미를 뽐내며 걷기도 했던 꽤 예쁘장한 여자였다. 하지만 바퀴는 굴렀다. 바닥에 딱 붙어 굴렀다. 골목에 세워진 차들은 항상 이동을 불편하게 했고 계단은 단 한 개도 올라갈 수 없었고 세상의 바닥엔 수많은 턱들이 있다는 걸 느꼈다. 선화에게 세상이 너무 생소해졌다. 마치 처음부터 걸음마를 배우는 사람처럼 살아야했다. 이동은 사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주에서는 다를 것이다. 선화는 조용히 떨어진 컵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꺼냈다. 선화의 무의식이 검은 우주를 배회했다. 엄마는 저녁거리를 사러 밖에 나갔다. 이제 막 오후2시를 넘긴 시간 이었다. 엄마는 꼭 장을 보기 전에 윤희 이모와 티타임을 가진다. 윤희 이모는 병원에서 만난 이모였다. 펜싱국가대표였던 아들이 선화처럼 휠체어 신세가 되었다. 둘은 아마 공통된 상처를 서로 다독일 것이다. 엄마는 아마 5시는 넘어서 오겠다고했다. 선화는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전송했다. 엄마가 직접 그려 넣은 파란색 장미였다. 사진 속 장미는 어린아이가 멋대로 뜯어버린 꽃이 되어버렸다. 차라리 시들어진 것 같은 모습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선화였다.   -오면 좀 치워줘.   미안한 마음에 무뚝뚝하게 말을 전했다.  아마 3시간 쯤 후엔 따뜻한 바닥에 못 이겨 쏟아진 물들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선화는 그런 물의 성질을 이해했다. 뭐든지 바닥보다는 공중으로 떠다니고 싶어하는 선화였으니까. 조금씩 증발하며 공기중으로 올라가는 물은 우주로 날아가고있는 선화의 무의식 같았다. 아직은 물에 흠뻑 젖은 파편이 휠체어 바퀴를 상처내지 못하게 휠체어를 뒤로밀었다. 주방을 한바퀴 돌아서 나갈 요량이다. 휠체어를 돌려 맞은편 식탁을 기점으로 주방을 빠져나가 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선화는 여전히 지구밖에 나와 있었다. 중력을 무시한 채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했다. 휠체어 신세로는 휠체어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에만 가야했다. 아주 한정적이고 뻔히 보이는 쉬운 수학문제처럼 따분했다. 하지만 우주는 달랐다. 선화의 상상속 우주는 어디든 갈수있었다. 적어도 지금 선화에겐 방문 앞으로 가는 길보다 달이 더 가까웠다. 선화는 방문을 열고 힘겹게 침대에 누웠다. 이미 무의식은 방문 앞에 도착하기  한참 이전에 달의 입구에 도착해있었다. 선화는 침대에 누웠다. 상상은 휠체어 위에서 보다 침대 위가 한결 잘되는 것 같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머리카락 한 올도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것이 없었다. 선화는 이내 눈을 감았다. 세상의 문이 닫혔고 달의 입구가 열렸다.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1969년 7월 20일 오후11시경에 남겨진 것이었다. 지구에서는 그것을 닐암스트롱의 발자국이라고 부르지만 달이 입장에선 닐암스트롱도 하나의 운석덩어리가 아니었을까. 그저 발자국은 처음 보는 형태의 운석이 남긴 독특한  크레이터(행성 위성 따위의 표면에 보이는움푹 파인 큰 구덩이운석충돌에 의하여 생긴 것)이지않을까.  장갑을 벗고 달 안으로 팔을 뻗어 넣고 손바닥을 쫙 폈다. 긴장감이 역력한 손바닥엔 땀이 흥건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땀을 말려줄 바람이 불지 않았다. 신기했다. 정말 은태의 말이 맞았다. 달에는 대기가 없다 고로 바람이 불지 않는다. 달의 세상에선 모든 흔적이 영원하다. 한번 남겨진 크레이터는 사라지지 않는다. 결혼을 약속하고 은태와 드레스를 입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유난히 햇살이 좋았던 날이었다. 봄의 신부가 되려던 선화였다. 가녀린 어깨를 드러내고 풍만한 가슴 선을 수놓은 수백 개의 보석장식 아래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날이 떠올랐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달 위를 걷는 것이 아닐까  지워지지 않는 어떠한 흔적을 남기는 일이지 않을까. 선화의 무의식이 은태 앞에서 드레스를 입던 그 순간에서 발을 내딛으려는 찰나 선화는 자신의 옷차림이 웨딩드레스가 아님을 자각했다. 달의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눈이 떠졌다. 오른쪽 눈 밑에 위치한 점은 마치 눈동자를 따라다니는 위성 같았다. 이불을 걷어버리고 침대 옆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침대가 뒤쪽 베란다에 붙어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열수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이마의 땀을 말렸다. 땀이 마르며 높아진 체온이 내려가는 걸 느꼈다. 상쾌하게 날아가는 열감이었다. 바람이 멈출세라 황급히 양팔을 뻗고 손바닥을 폈다. 땀에 젖었던 잔머리는 어느새 말라버리고 가볍게 흔들리며 이마를 간질였다. 보송해진 양손을 부비 적 거렸다. 바삭한 소리가 났다.      

 선화는 밖으로 나왔다. 요 근래 유일하게 외출하게 되는 건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도서관에서 대중없이 책을 읽는 행위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양털이 두툼한 외투를 입었다. 밖을 거닐면 열에 넷은 입고 있는 옷이다. 하얗고 두툼한 팔이 휠체어를 굴리니 주변을 둘러싼 대기가 선화를 역행했다. 혼자서 외출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가까웠다. 도서관은 평일에만 문을 열었다. 주말에 열지 않는다고 해서 불편할건 없었다. 어차피 사람이 붐비는 주말엔 밖을 잘 나가지 않으니까. 도서관이 좋았던 이유는 경사로가 설치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유모차를 끌고 책을 빌리러오는 엄마들도 있었다. 다만 가끔씩 치맛자락을 잡고 걷는 어린아이들이 질문을 자주했는데 주로 이 누나는 이 언니는 왜 의자에 앉아있냐는 질문을 했다. 시끄러운 소음은 듣고 싶지 않았기에 도서관이 보이는 골목에서부터 음악을 들었다. 철없는 중학생이 써놓은 듯 보이는 골목 담벼락의 낙서 아래에 무성하게 핀 잡초가 보였다. 선화는 이어폰을 꽂았다. 차도 지나다니는 골목이어서 위험한 행동 이었지만 선화는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도서관입구에서 계단을 총총총 뛰는 아이가 보였다. 아이의 다리는 계단에 들어맞는 블록처럼 보였고 선화는 뒤따라오는 느린 차량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듯했다. 아이의 걸음으로 스무 발자국 쯤 되는 거리를 더 뒤따라오던 차는 이내 참지 못하고 클락션을 울렸다. 뇌를 찌르는 것 같은 굉음이 선화의 귓가에 흐르던 음악을 앞질렀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명쾌하고 지독하게 소리쳐 본적이 있었는가 생각해 보았으나 이별하던 순간에도 조용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선화는 사고이후에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는 은태가 그저 고마웠다. 선화의 엄마마저도 장애인이 된 딸을 떠나달라며 말할 때에도 은태는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지구를 구르는 나날들이 하루하루 더해져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꽤 긴 시간이었다. 익숙해질 듯 익숙해지지 않는 삶이었다. 그래도 선화는 받아들이고 있었다. 처음에 그런 불행에 내던져 졌을 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 되어갔다. 다시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래도 재활치료는 늘 성실히 받았다. 그냥 남들보다 열심히 하면 혹시 신이 자신을 봐주고 걷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머릿속 뒤편에 숨겨둔 채로 그렇게 살았다. 선화는 그렇게 휠체어를 굴리며 병원을 퇴원했다. 은태 쪽 부모님은 둘이 헤어지길 바랐으나 이미 큰 사고를 당한 여자아이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 없어서 그냥 침묵하는 것과 은태에게 넌지시 이별을 권하는 말들을 돌려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뜻을 표현했다. 선화는 퇴원 후에 복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냥 이 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거기까지임을 실감했고 딱히 큰 상처는 받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냥 선화는 잘 구르고 싶었다. 그것 뿐 이었다. 그런 선화와 은태 앞에 3살짜리 아이가 달려와 넘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이는 엉엉 울었고 은태는 바로 가서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며 울음을 달랬다. 아이의 엄마는 달려왔고 고맙다고 말하며 아이를 팔에 안고 등을 토닥이며 멀어져갔다. 그랬다 은태는 아이를 좋아했다. 외동아들이었던 은태는 늘 3명은 낳아서 키우자고 말했다. 선화는 문득 비어버린 상가 통유리에 비친 자신과 은태를 바라봤다. 28살에서 8살이 되어버린 듯이 작아져 버렸다. 선화는 넌지시 은태에게 말문을 열었다. “ 나 엄마가 되기 힘들 거 같아” 은태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둘의 침묵이 이어졌다. 은태는 단 한 번도 둘 사이의 정적을 방관한 적이 없었다. 은태는 사랑할 수 없는 선화의 부분들까지 사랑하려 애썼으나 그러한 부분마저 사랑할 수 없을 만큼만 사랑했다는 사실만 마주한 채 선화의 옆을 걷고 있었다. 그 걸음은 그저 관성이었다. 멈추는 법을 몰라 걷는 걸음이었다. 선화는 끝이 난 별처럼 폭발해 버리고 싶었으나 그저 말라버린 나무처럼 변한 은태 위에 조용히 시들어버린 꽃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무렵 골목의 담벼락을 등대삼은 쓰레기봉투 더미위엔 길을 잃은 벌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선화는 그 길을 도망 치 듯이 나와 내달렸다. 여진처럼 옅어지는 클락션의 굉음을 뒤로한 채 경사로를 올랐고 열람실에 도착했다. 아파트에서 제공하는 도서관 치고는 규모가 컷 다. 족히 10개는 되어 보이는 철제로 된 책장들엔 빼곡히 책들이 꽂혀있었다.  선화는 평소 즐겨 읽던 독일문학 책이 꽂혀있는 가운데 책장 안으로 들어갔다. 세로로 크게 적혀진 소설의 제목 아래에는 소설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선화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을 골랐다. 뜻을 모르겠는 작가의 어려운 이름이 좋았다. 적어도 베른하르트 슐링크 라는 이름을 하고는 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창가 쪽을 바라보는 방향에 자리를 잡고 책을 폈다. 소설의 처음은 독일의 근대사를 잘 몰라서인지 주춤거리며 읽었지만 가독성이 좋은 탓인지 책을 읽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책장보다 왼쪽의 책장이 더 두꺼워질 때쯤 비가 내렸다. 선화는 책을 책상위에 뒤집고 비 내리는 오른쪽 창문을 바라보았다. 왼손은 어느새 왼쪽 턱을 감싸고 있었다. 빗방울은 굵었고 빠르게 떨어졌다. 비는 창문을 때렸다. 마치 창문 너머에 사는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듯 했다. 이 열람실에 있는 사람은 선화와 선화의 반대편에 앉아 신문을 읽는 안경을 쓴 노인뿐이었다.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것이 처절하다고 느낄 때 쯤 노인은 열람실을 빠져나갔다. 적어도 비는 자신이 적셨던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듯 했다. 선화는 결국 창문너머로 손을 뻗었다. 떨어지는 비와함께 은태의 얼굴을 만졌다. 3년 전 가을날 약속시간보다 일찍 카페에 도착한 선화는 먼저 커피를 시켰다. 은태에게 도착했다는 문자를 다 보냈을 즈음에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은태는 오고 있다고 했다. 밖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커피 잔을 감싼 손이 뜨거워 잠시 내려놓았다. 시간이  흐른다는 걸 느낄 때 마다 핸드폰과 카페 창 너머를 바라보기를 열 번쯤 했을까 어느새 커피가 점차 온기를 잃다 못해 결국 차가워졌고 은태가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나타났다. 선화의 손끝이 은태의 젖은 얼굴을 어루만졌다. 비는 자신이 적신 선화의 손끝을 기억하고 창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비는 축축하고 차갑다. 그 기억은 볼록하다. 해가 내리쬐는 날에 감싸던 은태의 얼굴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손끝에서 멀어진지 오래다. 비에 젖은 은태의 얼굴만이 비를 만졌을 때 비에 섞여 읽힌다. 이제 비가 그치고 손끝이 말라온다.

  책장을 넘겼다. 자신도 모르는 채로 다섯 번째 줄을 읽고 있었다. 첫 번째 줄이 뭐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대체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글을 읽었다. 그렇게 몇 장을 더 넘겼을까 마지막 장에서 많이 멀지않은 페이지의 끝이 접혀있었다. 선화는 책 끝을 폈다. 그래도 자국은 남아있었다. 이 책을 먼저 읽고 접어놓은 누군가의 머릿속에도 자국이 남아있을 것만 같다. 무음으로 해놓은 핸드폰에는 엄마의 부재중전화가 찍혀있었다.  - 선화야 도서관이니? 비 오니까 데리러 갈게. 선화는 괜찮다는 답장을 보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혼자 하고 싶었다. 어차피 비도 그쳤으니 어려울 건 없었다. 선화는 집으로 향했다. 비 내린 거리위의 휠체어 바퀴는 물에 젖었다. 젖지 않은 땅위를 구를 때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이 그려졌다. 선화는 뒤를 돌아 평행선을 바라보았다. 선과 선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길고양이 마저도 젖은 발로 찾아와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화는 고독한 빈 공간을 응시했다. 이것에 익숙해져야했다. 자신의 평행선 사이로 들어와 발자국을 남겨줄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 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화는 은태의 발자국을 가져오고 싶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선화는 두 개의 선 중 조금 더 진하게 그려진  선을 부여잡고는 더 길게 늘렷다. 선화의 손에서 더 길어진 선은 닿을 수 없는 세상을 닿게 만들었다. 선화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 위를 외줄 타듯이 걸었다. 수평선을 기준으로 바다와 하늘을 반으로 나누었을 때 해가 하늘보다 바다에 더 가까워 졌고 햇빛은 깨진 유리처럼 바닷물위로 떨어졌다. 선화는 태양을 등지고 셀 수 없는 빛의 조각들이 만든 좁은 길 위로 걸어 나왔다. 조각들이 사라지고 얕은 바닷물에 발이 빠졌다. 선화는 발가락으로 모래를 꼬집듯이 잡았다. 그렇게 해야지만 서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쓰러질 것 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단순한 중추신경계의 장애가 아님을 느꼈다. 일곱 번째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차원에선 걷고 뛰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물이 빠지는 해안가를 걷는 은태의 축축한 발자국들은 깊게 패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그리움에 비례한 듯 한 깊이로 말이다.      

  둘의 연애는 가끔씩 철따라 이동하는 새떼들의 주기 정도로 삐걱거렸다. 입에서 나오는 문장들은 길을 잃은 어린애마냥 방황하며 단어를 배열했다. 예를 들면 “그게... 저번엔 아 그게 아니지 아 그게 아니었잖아.” 대체 저번에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듣는 사람은 모르겠는 그런 문장들. 은태와 선화의 관계가 게임의 후반부로 향하는 젠가 탑처럼 흔들거리게 만드는 일들은 그냥 여느 커플들이 싸우는 이유와 비슷했다. 먼저 취업한 선화의 퇴근길에 은태가 마중 간 날이 있었다. 선화는 같은 해에 입사했던 동기4명과 함께 회사 건물을 내려오고 있었다. 은태는 반가운 마음에 크게 손을 흔들었으나 선화는 옆 동기들과 수다를 떠느라 은태를 못 본 듯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계단을 다 내려올 즈음엔 은태를 발견하고 선화도 크게 손을 흔들었으니까. 근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였다. 평소 팀 내에서 아줌마로 불릴 만큼 친화력이 좋던 선화의 남자동기가 선화에 귀에 귓속말을 했고, 선화는 크게 웃었다.  은태는 젠가 블록을 하나 빼들어 가장위에 올렸다. 높이 솟을 대로 솟은 것이 고층 아파트 같았다. 블록이 빠진 자리에 생긴 네모난 구멍은 창문 같았다. 은태는 자신이 마치 창문너머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듯 착각을 했다. 자신이 선화의 집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밖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쩌면 군대 때문에 늦어진 취업이 만들어낸 일종의 열등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은태였다. 다만 그런 열등감은 좋은 단어의 배합으로 표출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순간의 장면에 끓어오르는 감정만으로 은태는 선화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그런 오해가 생길 때면 선화는 은태를 자신의 낡은 소나타에 태웠다. 차를 뽑은 건 1년 남짓 이었지만 중고로 샀기에 여기저기 문제가 많았다.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 천장에 불이 안 들어오는 것 같은 사소함이 매력인 차였다. 소나타는 바다를 향해 달렸다. 도심을 빠져 나오기 전에 차안을 감싸던 어색한 적막을 깨주는 것은 조수석 뒷문의 잠금장치였다. 빠르게 달리면 탁..!탁..! 거리며 소리가 났다. 은태의 긴팔이 잠금장치를 잠그면서 대화가 시작됐다. 도심을 빠져나온 차가 점점 짭짤해지는 공기를 맛볼 때 즈음엔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은태는 바다를 좋아했다. 선화는 자신이 바다를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은태가 좋아해서 자신도 좋아하게 된 것인지 아직도 그 경계가 모호하다. 선화가 처음 동아리에서 은태에게 호감이 생길 무렵이었다. 그냥 키가 크고 손이 예쁜 은태에게 호감이 있었다. 그게 사실 호감인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건 호감은 맞는데 그때 자신은 은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 중 이었던 것 같다. 약간의 부정기 같은 것. 돌이켜보면 선화는 동아리에 가기 전에 한 번 더 자신의 몸 냄새를 맡거나 거울을 한 번 더 보곤 했다. 그 행동에 은태가 관련되지 않을 순 없다. 행동의 이유를 100이라고 했을 때 적어도 은태가 차지하는 비율이 50은 될 듯 한 행동이었다. 그때 동아리에서 바다 이야기가 나왔다. 다 같이 바다에서 출사를 하자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 말을 꺼낸 건 은태였다. 바다에 가자는 신입생의 의견에 모두가 머뭇거릴 때 선화는 정말 좋다고 말했다. 바다가 좋았던 건지 은태 때문에 그 말을 한 건지 선화는 아직도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 선화는 바다를 쭉 좋아해왔거나 바다를 좋아하게 되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뭐든 상관없었다. 바다도 좋았고 은태도 좋았다. 좋은 두개를 함께해서 더 좋았다. 지금 선화는 그때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화는 냉기가 가득한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비에 젖지 않았냐는 질문을 했다. 비가 그친지가 꽤 지났는데 그런 질문을 하는 엄마가 약간은 지겨웠다. 엄마는 중앙난방이 고장 나 아파트 전체가 보일러가 작동이 안 된 다고 말했다. 선화가 집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고서 꺼진 듯 했다.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 선화는 전기장판을 켜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두툼한 이불을 다 데우려면 10분 내외의 시간이 걸릴 듯 했다. 거실에선 TV 소리가 들렸다. 예능 재방송을 보는지 출연자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음으로부터 멀어지려 침대 옆 탁상에 놓인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은태의 얼굴을 만지던 그 순간을 상상했다. 분명 오른손으로 만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른손잡이니까 뜬금없이 왼쪽 손을 올리진 않았을 거다.  은태는 뭘 입고 있었을까  무슨 표정을 지으며 날 봤을까. 궁금했다. 은태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순간들은 수없이 많았다. 몇 개의 장면들을 떠올려보았다. 사진첩을 넘기듯 추억들이 뇌 속의 이름 모를 혈관들을 타고 움직였다. 같이 연어를 먹었던 날도 기억이 났고 함께 여행을 떠난 날도 기억이 났다. 다만 연어를 먹은 날이 먼저인지 함께 여행을 간 날이 먼저인지 모를 뿐 이었다. 헷갈리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체 우리는 몇 번이나 연어를 먹었을까. 못해도 둘이서 열 마리는 먹었을 것만 같은데. 둘이서 함께 먹은 연어들을 추억하다보니 그냥 한 마리의 연어가 침대에 누워 있는 듯 했다. 선화는 연어가 되었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그 연어. 기억의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정확한 중력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물살들을 꼬리로 힘차게 헤엄쳤다. 다리를 달고 있었으면 쓸모없이 무겁기만 했겠지.

연어는 흐르는 기억들을 보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눈물은 연어가 그리워하는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그 시간만큼 흘렀다. 연어가 너무 많이 울어서 강이 범람했다. 눈물 때문에 강물이 너무 불어난 것이다. 불어난 강물위로 바람이 불었고. 연어는 넘치는 물을 견디지 못하고 강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푹신한 침대위에 떨어진 연어는 이제 상체만 파닥 거렸다. 

 선화는 기억들을 되새기다 보니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인지 무척이나 답답한 것이었다. 눈물이 날만큼 생생한 기억들인데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점..점.....점..... 선화는 붓을 잡은 듯이 손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주먹에 붓이 잡혀있는 듯했다. 선화는 점을 찍기 시작했다. 여기...? 아니야... 오른쪽이야.... 아니 오른쪽 맞는데..? 다시 점을 찍었다... 이런 왼쪽이잖아... 잠깐 그게 여기 좀 밑에 있었나...? 정확하게 떠오르지가 않네...? 그럼 일단 찍어보고 찍은 점들을 하나씩 살펴야겠다. 선화는 천장에 은태의 얼굴을 떠올렸다. 휜색 천장이 마치 빔 프로젝터의 스크린처럼 되었다. 선화의 기억을 통해 눈으로 쏘아진 은태의 얼굴이 천장을 가득 메웠다. 다시 붓을 들고 은태의 얼굴에 점을 찍기 시작했다. 왼쪽 오른쪽 위 아래.. 덧칠에 덧칠을 더하던 점들은 어느새 천장을 까맣게 색칠해 버렸고 은태의 얼굴마저 덮어 버렸다. 그 점이 그리웠다. 선화는 방을 온통 까맣게 칠해버렸다. 까맣게 변해버린 공간은 이제 사각형의 공간이었는지 세모였는지 정 육각형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다. 그냥 그 까만 공간의 주인이 동그라미라고 주장한다면 그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다. 선화는 하나의 점이 되었다. 그 점은 네모난 아파트를 탈출했다. 은태의 얼굴위에 있던 점이 어디로 도망간 거다. 그게 바로 선화가 만들어 낸 점이다. 이제 굴러가 박혀야 한다. 구르는 건 자신 있다. 이 세상 무엇보다 빠르게 구를 자신이 있다. 그게 빛이라 할지라도. 보통 빛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면 이라는 가정을 한다. 빛은 달린다. 빛은 다리를 달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달린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빨리 잘 달리는걸 보면 빛은 다리가 분명 두 개 이상을 넘어선 세 개 아니 백 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상관없다. 선화는 다리가 없다. 그냥 다리모양을 한 짐을 달고 있을 뿐이다. 선화의 둥근 점은 빛보다 빠르게 구르기 시작했다. 까만 점 안에 피부가 하얀 선화가 웅크려있다. 하얀 점처럼. 점을 반으로 갈라보면 아몬드를 둘러싼 초콜릿처럼 보일 것이다. 맛없어 보이는 까만 초콜릿이 빛보다 빠르게 구르고 있었다. 빛은 자신의 모든 다리를 사용해 뛰었다. 초콜릿 같은 점은 이제 빛을 추월했다. 거리는 계속해서 벌어졌다. 초콜릿은 자비 없이 굴렀다. 빛에게 자비 없는 게 아니라 아몬드에게 자비 없이 굴렀다. 아몬드는 초콜릿 밖으로 튕겨 나왔다. 아몬드를 행성에 내려준 초콜릿은 이제 잠이든 은태의 얼굴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몬드는 기지개를 폈다. 꽃이 피듯 선화가 행성에 피어올랐다. 빛은 한참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빛보다 빠르면 할 수 있는 게 있었다. 바로 빛이 담은 과거를 열람하는 일. 초콜릿 같은 점을 얼굴에 박은 은태의 얼굴을 한번만 보고 싶었다. 이 행성에서는 하나의 빛만 열람할 수 있다. 멀어진 거리만큼의 과거 중에 가장 그리워하던 날의 빛을 볼 수 있다. 대신 밝은 시간대의 빛은 볼 수 없다. 이 행성의 규칙이다. 빛을 내 멋대로 열람할 수 있는 다른 행성들도 많았지만. 아몬드가 이 행성에 굴러 떨어진 것은 선화가 바람이 부는 행성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 행성이 이토록 까다로운 이유는 그저 운석에 불과한 아몬드가 구르며 남긴 크레이터를 지워주기 때문이다. 선화는 자신이 은태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원히 남기고 싶지 않아했다. 그리워하는 것도 그리워했던 적도 그냥 망각의 바람에 사라져 버리길 원했으니까. 세상 어디에든 자신의 그리움이 있을지라도 그 그리움이 유한하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자 위로였다. 바람이 불면 그 빛을 열람할 수 있다. 바람을 기다리는 선화였다. 


 은태의 눈꺼풀위로 초콜릿이 떨어졌다. 은태의 옅은 체온에 초콜릿은 녹아내렸고 은태의 시야를 새까맣게 만들었다. 은태는 어둠 위를 걷는 듯했다. 불빛 없는 골목은 깜깜했다. 모자까지 눌러 쓰고 있어서 약간은 위협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워낙 키가 커서 더욱 그래보였다. 엄청난 어둠이었다. 달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의 골목을 걷는 듯 했다. 아마 그 행성을 걷는 거라면 달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지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행성일거라고 생각했다. 왜 이곳에 떨어져 걷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빛을 잃은 사람의 시야 같은 어둠의 끝엔 약간의 불빛이 있었다. 그냥 그것을 목표로 걸었다. 무섭지 않았다. 시야는 점점 불빛과 가까워져 서서히 눈꺼풀을 올리고 있었고 은태는 그 빛에 문득 자신이 반팔을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원래의 세상은 두툼한 외투로 몸을 감싸도 추웠는데 지금은 오히려 더웠다.  모든 정황을 따져가며 은태는 남반구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그냥 하나의 꿈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이곳은 선화네 집으로 가던 골목이었다. 유일하게 골목을 비추던 가로등의 모습이 완성을 앞둔 조각상처럼 확실하게 보였다. 은태는 불빛의 중력에 이끌려 다리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     

 선화도 행성의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사막에 물이 있는 곳을 오아시스라고 한다면 이곳의 오아시스는 빛이 있는 곳이다.  인간이 정해놓은 거리의 개념을 뛰어넘는 거리에 있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빛, 선화는 그 빛을 펼치러 가고 있다. 그저 무심코 책상위에 올려둔 책을 펼치듯이 말이다. 하나의 점이 궁금해서 점이 되어 굴러버렸지만 사실은 한번이라도 그 사람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깟 점 따위가 얼굴을 굴러다닌대도 마주하던 그날의 공기와 온도를 느끼고 싶었다. 은태와 헤어지고도 여름은 왔고 여름은 잠시 왔다 지나가는 계절도 아니었다. 못해도 3달은 찾아왔다가 떠난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들로 다음 여름은 더 길어질 거라는 약속까지 한 채로. 선화가 가장 그리워하는 여름밤도 분명 온다. 그 약속은 적어도 정말 하다못해도 정말 여름밤에게 미안한 비유지만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남자들의 약속보다 훨씬 믿을만한 약속이다. 영원한 사랑이 있을까 우리가 사는 3차원에서는 없는 일 같다. 영원한 사랑은 그저 이름 모를 행성의 21차원정도에 사는 수많은 생명체중 하나가 행하는 일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날의 여름밤이 보고 싶다.      

 선화는 여름밤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서서히 빛이 보였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주어만 있는 의문문이 골목에 바람을 일으켰다. “선화?” 그녀를 부르는 은태의 혀끝은 앞니를 툭 치더니 이내 붉은 입술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선화의 앞머리가 흔들렸다.

 침대에 누워 얼굴을 마주하고 선화보다 키가 큰 은태가 조금 더 위에 얼굴을 두면 은태의 입술이 선화의 이마와 가까워졌다. 그 상태에서 은태가 선화를 부르면 그 바람이 불었다. 선화를 부르는 그 바람이.

 선화는 바람을 느꼈다. 그 여름밤의 은태가 보였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끊임없는 대화들이 탁구공처럼 둘 사이를 툭툭 쳐 대던 날들 그런 즐거운 하루를 끝끝내 마무리하고 헤어지던 날의 골목길, 꼬맹이가 손으로 늘어뜨린 풍선껌 보다 긴 여름의 밝은 초저녁도 너끈히 넘기고 수많은 사람들 중 오직 더위에만 뒤척거리다 잠결에 발견하는 여름의 어둠을 둘은 함께했다. 그 어둠을 뚫고 걷던 둘의 골목 선화는 그 골목이 그리웠다. 너무 평범해서 그리웠다. 그 평범한 하루를 한번만 더 느끼고 싶었다. 반팔을 입은 은태를 보았다. 은태는 선화를 발견했다. 휠체어에 앉아 자신을 위로 올려다보는 선화였다. 빛은 선화를 위로 끌어 당겨 선화를 일으켜 세웠다. 빛의 중력에 선화의 하얗고 가냘픈 다리가 우뚝 섰다. 은태는 모자를 벗고 머리를 헝클였다. 손등이 얼굴의 중앙을 가리고 재빠르게 점점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목 뒤에 안착했다.  선화는 은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똑같이 오른쪽 눈 밑에 찍혀있는 점을 보고는 후련한 듯이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나 거울을 들여다본 선화였다. 정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생각에 허무했다. 꿈속에서 굴러다녔는데 현실에 와서도 몸이 아픈 듯 했다. 정말 굴러다닌 사람처럼. 엄마는 방문을 두드렸다. 아침을 먹으라고 부르는 듯했다. 잘 차려진 과일들과 음식들 위로 엄마의 손이 불쑥 올라오더니 티켓 두 장을 보여줬다. 음악회 티켓이었다. 구른 몸으로 음식들을 맛있게 우겨넣고 밤새 뜨거운 침대에서 흘린 땀을 씻어냈다. 씻고 보니 꽤 봐줄만한 얼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선화는 오랜만에 화장을 했다.  음악회에 가는 일은 꽤 즐거운 일이니까. 선화와 엄마는 서로의 목도리와 원피스를 골라주며 독특하게 점심이 조금 넘어서 열리는 음악회에 가기위해 차에 올라탔다. 엄마의 능숙한 운전에 선화는 잠이 잠깐 들었다. 

 음악회장은 회색의 딱딱해 보이는 건물과는 달리 내부는 따뜻한 갈색으로 되어있었다. 대충 공연장 내부사진을 보니 계단이 많아보였다. 아까부터 선화에게 눈길을 주던 갈색머리의 여자는 장갑 낀 둔한 손으로 팜플렛을 꼭 쥐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도와주세요. 그럼 감사할거 같아요.” 선화는 담담하게 말하며 끝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남자 직원 부르면 되는데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도 웃으면서 감사함을 전했다. 아무래도 남들보다 불편한 몸 때문에 일찍 온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선화였다.

 갈색머리 여자는 직원을 불러왔다.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직원은 한눈에 봐도 가냘팠다. 오늘은 남직원들이 다 쉰다고 말했다. 아무리 사람이 세 명 이고 선화가 말랐지만 휠체어를 탄 사람을 계단 아래로 내려 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물은 신식인데 베리어프리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  신기했다. 엄마는 초초한 얼굴로 나중에 맨 끝자리 사람과 티켓을 바꾸는 게 어떠냐는 말도 꺼냈다. 그래도 이왕이면 앞에서 보고 싶다고 선화는 생각했으나 뭔가 부탁을 당연하게 하는 것이 미안했던 찰나에  갈색머리 여자는 곧 자기 남자친구가 온다고 말했다. 여자는 장갑을 벗고 커플링으로 보이는 반지가 반짝이는 손을 들고 통화를 했다. 

“거의 다 왔다고? 나 보여? 나 안에 있어.” 익숙한 남자가 손을 흔들며 걸어들어 왔다.     

 세상이 해변으로 변했다. 은태는 선화 앞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선화는 늘 은태를 해변위에 올렸다. 언제나 생각이 나지만 언제나 지우고 싶었다. 생각이 나는 건 미련인데 그 미련이 싫으니까 지우고 싶었다. 해변은 그런 의미에서 훌룡하다. 파도가 치면 모든게 사라지니까 그리움이 절정으로 치닫는 밤과 새벽에 물이 빠진 해안가에 깊게 패인 은태의 발자국들도 한낮의 파도에 다 쓸려나간다. 그리움 미련 이러한 감정들을 파도는 하찮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고 싶지 않은 발자국들이 있다. 그런 발자국들이 남겨진 날에는 태양과 달로부터 탈출하여 선화의 바다가 넘실대는 행성을 좀 멀리 보내고 공전과 자전을 게을리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허나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일까 상상만 했던 무엇인가를 이제 마주했다. 은태는 누군가의 연인이 되었다. 사랑했던 연인의 중심에서 밀려나 파도의 끝자락이 되어 뜨거운 태양에 금새 말라버리는 선화의 물살은 이제 은태를 흠뻑 적시지 못한다. 이제 그런 위치가 되었다. 

  은태는 선화 뒷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냥 집에 가자는 엄마의 말에도 선화는 굳건한 표정으로 혼자라도 여기 남을 테니 엄마 혼자 떠나라고 말했다. 어차피 엄마는 자신을 두고는 절대 떠나지 않으니까. 선화는 음악을 듣고 싶었다. 아니 안 듣고 집에 가야할 이유가 없으니까.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뿐이니까. 우리 둘 사이에 어떠한 스파크가 튀었나 설사 튀었다 한들 그게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니까 음악은 감미로운 것이며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예술이니까. 다만 뒤에 앉은 은태의 시선이 그리고 그의 머릿속이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약간 아니 좀 많이 불편할 뿐이다. 장애인이 된 이후로 선화는 불편을 마주 할 때에 좀 의연해졌다. 그것이 신체적인 불편함을 포함한 정신적인 것이나 인간관계의 흐름일지라도. 

 연주는 시작되었다. 악기의 선율에 따라서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세상이 해변이었으니 음악의 움직임은 파도가 되어도 큰 이질감이 없다. 은태가 남긴 해변의 크레이터들이 거센 파도에 사라졌다. 흔적도 남지 않은 해변에 옅은 파도가 몇 번 더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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