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라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갑자기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졌지만 나의 경제 활동이 위태로워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벌어진 일을 끌어안고 한탄하는 우매한 처사로 시간을 녹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평소에 못 쓰던 글을 더 쓰고 책을 더 읽기로 했다. 오전에는 조깅도 하면서 내게 주어진 3주를 나름대로는 알차게 보내고싶었다.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며 우연히 <넷플렉스 스토리텔러응모전>을 보았다. 부족한 글솜씨지만 내가 발견한 공모전에는 되도록 응모하는 편이다. 어떻게든 계속 글을 쓰는 동기부여가 되고 응모전에 보내는 글은
아무래도 더 신경쓰고 완성도 있게 마무리 하려하기 때문에 내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공지문을 읽고 넷플렉스를 다운받자마자 <미스터 션샤인>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방영될 때부터 보고 싶었지만 바쁜 업무로 tv앞에 앉을 시간도 없었고 본다 한들 마지막회까지 챙겨볼 자신이 없었다.
다른 영화나 드라마는 더 찾아보지도 않고 시청을 시작했다. 몇 화까지 있는지도 모르고 보기 시작한 드라마는 꾀나 길었다. 새벽늦게까지 보다가 잠들기를 이어간 끝에 마지막회까지 시청을 모두 마쳤다.
매력있는 인물을 소개하는 감상편<1>과 극중 명대사들을 소개하는 감상편<2>까지 두 꼭지로 정리하려 한다.
★시대적 배경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 역사물을 좋아하는 편이다. 각색이 되기는 하겠지만 시대적인 배경은 좀더 몰입감을 주게 된다.
미스터 션샤인은 고종이 조선의 26대 임금으로 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어 새로운 변화를 도모하려 했지만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개입은 근대화를 지연시켰고 이로인한 강대국들의 간섭이 끊이지 않아 민심이 안정되지 못했다. 학창시절에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신미양요,병인양요,임오군란,갑신정변,을미사변,청일전쟁,러일전쟁 이 모든 혼란이 조선을 휩쓸고 지나던 격변의 시기였다.
주인공들이 풀어나가는 갈등은 시대의 그늘진 곳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한 여인을 가슴에 담은 사내들의 분노와 슬픔과 사랑이 절제되어 보는 내내 잔잔한 여운과 울림이 남았다.
낮은 신분으로 태어나 감당해야 했던 고단한 삶과 약소국의 국민이어서 짓밟혀야 했던 역사가 보는 내내 측은했다. 불과 100년이 조금 지난 이야기라는 것에 혹시 아직도 우린 위태로움을 벗어난 것은 아닌지 또 다시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시대의 혼란스러움이 여주인공을 끊임없이 위태롭게 한다. 그때마다 그녀를 둘러싼 사내들의 사랑이 그녀를 지키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내들은 애<國>이 아닌 애<人>을 위해 그들이 갖은 모든 것을 동원해 여자를 지켰고 그 것은 그들의 삶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인물의 매력
유진 초이 : <사랑은 총쏘는 것보다 어렵고 그 보다 위험하고 그 보다 뜨거운 것이오! >
이병헌은 미군장교 유진초이를 연기했다. 어릴 때 추노꾼에게 쫒겨 미국으로 가게 되고 미국 국적을 갖기위해 미군 장교가 되었다. 조선 발령을 받아 돌아온 조선에서 인생을 뒤흔드는 운명을 만난다 .
단정한 제복에 휘날리는 롱코트, 군모를 바로쓰고 고개를 드는 영상은 남자가 봐도 빛이 났다. 함께 보던 아들은 연신 멋있다는 말을 남발했다. 나도 멋있어보였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수컷의 냄새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음에 들어온 여인을 위해 묵묵히 사랑을 할 수있고 신중하면서 따뜻한 배려가 있었다. 여자를 지키기 위해 강대국의 힘을 등뒤에 두고 아주 알뜰하게 잘도 써먹는다. 미국의 힘을 빌어 사랑을 지킨다는 것이 살짝 못마땅하긴 했지만 극중 유진초이의 조국이 미국이었으니 따질 여지없이 현실적이고 현명한 처사로 보여진다.
유진초이에게 고애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한다. 더욱 지킬 것이라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지켜야 내가 여자를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만이 낭만이 아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남자는 사회적으로 가진 힘을 지켜내야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서양의 근대적인 사고로 성장해서인지 극중 유진초이의 결정은 지지부진하지 않고 언제나 세련됐다.
고애신 : <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 되려하오 >
조선 말기 사대부집안의 손녀로 부모님은 일본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죽임을 당했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고애신은 뜨거운 피를 이어 받아 할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풍전등화같은 조국을 위해 총을 든다. 첫 거사에서 고애신이 총구가 가르키는 곳에 또 다른 저격수가 있는 것을 확인했고 도주하던 중 그 저격수로 의심되는 유진초이를 만나게된다. 그 인연을 시작으로 유진초이와 우연한 만남이 계속되고 뜻도 모른체 유진과 <러브>를 함께 할 것을 제안하며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다.
극중에 고애신을 마음에 담은 사내들은 둘이 더 있다. 동경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조선 제일의 부자집 도련님 김희성과 어릴때 애신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구동매다. 고집스런 고애신의 처사로 생기는 위기때마다 이 세 남자들은 스스로 또는 함께 뜻을 맞춰 그녀를 돕는다. 미스터 션샤인을 보며 계속드는 생각은 고애신이 너무 고집 불통이라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향하는 본인의 총구는 매번 그녀를 위태롭게하고 그녀를 지키기 위한 세 남자들의 헌신에 내가 미안할 정도지만 애신은 멈추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고애신을 바라보는 세 남자들이 하고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조건 없이, 바라는 것 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안녕을 지켜주는 것 > 말이다. 내어주는 만큼 받지 못함에 사랑에도 거리를 두는 이 속좁은 남자는 현실을 방패삼은 속물 같아 보였다.
충분히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옳은 말을하는 고애신은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양반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보는 내내 더 마음졸였지만 그 당당한 기상이 마음에 들었다.
김희성 : < 내 워낙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오 봄,꽃,달,웃음 그런 것들... >
조선 최고의 부자집 도련님으로 동경유학중 조선으로 돌아온 고애신의 정혼자 김희성이다.
그는 조상들이 저지른 악행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김희성이라는 배역의 매력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눈에 있지 않을까한다. 부자집 도련님으로 어려움 없이 성장해서 그럴만도 하겠만 극중에 조상의 악행으로 그가 겪어야하는 고초는 심히 괴롭다. 본인은 보지도 못한 조부와 부모의 죄값을 김희성은 웃으며 받아들인다. 그 억울함을 웃으면 안을 수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싶다. 극중 김희성은 억울하게 날아오는 비난의 화살을 양팔 벌려 맞는다. 하물며 부모에게 가서 따지지도 않는다. 당신들의 잘못으로 내가 밖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홀로 기울이는 술잔 앞에서마저 억울한 독백은 없었다.
자신에게 오는 것이 무엇이든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이 많았다. 아직도 한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내게는 너무도 와닿는 인물이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스스로를 위한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언제나 김희성처럼 웃지 못한다.
또한 김희성이라는 인물을 내가 매력적으로 보는 이유가 한가지 더 있다.
나와 같이 무용의 것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내 워낙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오 봄,꽃,달 그런것들...> 이라는 대사를 자주 하는데 극중 시를 쓰는 장면이 몇장면 있었다면 더욱 빛이 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후반부에 이름 없는 신문사를 차려 펜으로 나라를 위하는 일을 하지만 무용의 것을 좋아한다면 <기사>보다는 아무래도 <시>가 더 어울린다.
이제부터는 나도 누군가를 만나면 무용의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해야겠다.
구동매 : < 뭐가 달아! 달아서 쓰기만 한데!>
항상 허리춤에 두개의 칼을 꽃고 다니는 극악무도한 칼잡이로 내가 보기엔 극중 캐릭터가 가장 애매한 인물이다. 고애신을 짝사랑하여 그녀를 보호 하면서도 그가 가진 분노를 너무 뜬금 없이 표현할 때가 많다.
백정의 자식으로 태어나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하며 살았고 아들의 안전을 걱정했던 어미에게 내쳐진다. 어린 애신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동매는 일본으로 가고 사무라이 조직의 대장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온다. 돌아와 처음 한 일은 부모를 욕보이게 했던 이들을 베는 것이었다. 부모는 칼을 들고도 베지 못했지만 자신은 벨 수있다면서 조선에서의 삶에 분노한다.
구동매의 분노는 돌덩이처럼 뭉쳐져 모든 상황을 삐딱한 시선으로 본다. 살면서 항상 견제해야 할 감정이다. 아픔과 분노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뒷면의 어두운면만 보게한다. 상대의 한 마디 말도 꼭 한번 꼬아서 듣게 되니 분노가 가라 앉을 시간이 없다. 경험에 비춰 볼때 삶을 대하는 이런 자세엔 약이 없다.
애신에게 받은 한 번의 도움으로 그녀를 가슴에 두게 되고 애신과 마주하는 수 많은 갈등 속에서도 결국은 애신의 안녕을 위하는 결정을 한다.
이양화(쿠도히나) : < 앞으로 누가 널 해하려고 하면 울기보단 물기를 택해! >
사건과 갈등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글로리아 호텔을 운영하는 사장이다. 역시 아픈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극중 가장 고상하고 우아한 인물임에는 반론이 없을 것이다. 일본의 앞잡이인 아버지때문에 돈 많고 늙은 일본인에게 팔려 가듯 혼인을 했고 남편이 죽자 글로리아 호텔을 상속받는다.
그의 대사는 여지없이 명확하면서도 위트있고 고급스럽다. 코를 찡긋하면서 이야기하는 모습에서는 교태스러움이 묻어 나지만 절대 가볍지 않다. 모든 상황에 유연하면서도 뛰어난 언변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가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아마 연애상대로 만났다면 남자의 기를 죽이거나 자존심을 건들지 않는 현명한 처사로 남자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마음 껏 주무를 수있는 여자 같았다. 물러설 때 물러서지만 비굴하지 않고 제 욕심을 차리더라도 상대에게 상처주지 않는 처사로 위기를 넘기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두번 째 이름이 진짜 이름이 되고 두번 째 나라가 진짜 나라가 됐으며 이제 두번째 남자로 유진만 곁에 두면 되지만 유진이 향하는 곳은 애신이었다. 미스터 션샤인의 삼각관계중 가장 심플하고 깔끔한 짝사랑이지 않나 싶다. 쿠도히나는 단 칼에 가질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질척이지 않고 신중하며 현명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유진과 애신을 돕는 쿠도히나의 모습에는 쓸쓸함이 보인다.
★누가 보면 좋을까?
당연히 출연배우 중 좋아하는 배우가 있다면 추천한다. 위에 거론한 인물들은 극중 뚜렷한 매력으로 시선을 잡기 충분하다. 또한 역사극을 좋아하거나, 로맨스중에도 과감한 표현으로 뜨거운 사랑을 하는 것보다는 옆에서 지켜보며 가슴 저리는 사랑을 느끼고 싶어하는 분들이 본다면 만족스러울 것 같다.
나는 이병헌이라는 배우를 좋아하고 역사극을 좋아하며 로맨스스토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주 만족스럽게 보았다. <여명의눈동자> 와 <모래시계> 만큼이나 재밌게 봤던 드라마였다.
★간단한 총평
시대상 남녀의 사랑이 적극적으로 표현될 수 없었던 절제된 감정과 짝사랑으로 머물러야하는 관계들속에서 오는 아련한 감정이 보는 내내 먹먹했고 눈물이 흐르게 만들었다. 이런 매력들이 진지하게 마음을 울리게 했다면 인물들이 던지는 위트 있는 대사에서는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말장난 같지만 진지하고 스쳐 넘기기엔 가시를 품은 대사들로 시청자의 감성을 들었다 놨다 했던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