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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중독된 회사

어떤 중독(中毒)

by 까칠한 펜촉

‘일’이라는 단어는 참 매력적이다. 순수 한국어이면서 매우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고 쓰는 사람의 직업이나 감정 상태, 상황이 짐작되는 단어이다.


예를 들어, 엔지니어가 ‘일’을 하고 있다면 이는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다고 유추할 수 있고, 기획자가 ‘일’을 하고 있다면 새로운 무언가를 기획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50대 이상의 친구들이 ‘요즘 무슨 일 해?’라고 물어볼 때는 직업이나 업무를 물어보는 게 아니라, ‘아직 안 잘리고 회사 잘 다니고 있어?’라고 묻는 의미이다.


일을 표현하는 한자어로는 작업(作業), 사무(事務), 업무(業務) 등이 있고, 영어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와 단어가 있다.


일반적인 의미로서 Work, Task, Job

직업적인 의미로서 Job, Occupation, Career

수행해야 할 과업 또는 업무로서 Task, Duty, Assignment

현상이나 사건의 의미로서 Incident, Event, Matter

물리적인 의미로서 Work(Physics)

심지어 Thing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일’이다.


이처럼 한국어 ‘일’은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에 나는 특정 단어와 매칭하기보다는 ‘Something that must be done 즉, 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려 한다.




새벽녘에 일어나면 회사에서 온 메시지나 메일이 없는지 확인한다. 회사 메신저와 메일 확인은 잠들어 있는 순간을 제외하면 모든 시간 Stand by 모드이다. 잠들어 있는 시간조차 진동음이 울리면 저절로 핸드폰에 손이 가고 눈을 비비며 메시지와 메일을 확인한다.


주말과 공휴일, 휴가를 낸 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퇴근했지만 누군가는 일을 하고 있었고, 주말이나 공휴일, 내가 휴가를 낸 날에도 누군가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나의 이야기이면서 내 동료들의 이야기이고, 위 문장에서 나와 누군가는 모두 ‘나’이다.




채용 면접 중에 워라밸에 대한 질문을 하는 면접관이 있다. 나는 그들 질문에 저의를 알고 있다. 면접자는 워라밸 같은 거 필요 없고 회사에 입사하면 야근이던 뭐든 팀과 조직의 목표를 위해 열심히 달리겠다는 구라를 한다.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인간도, 설마…. 하는 눈초리로 구라를 치는 인간도 싫어한다.


찰나의 순간에 서로의 워라밸을 상대에게 붙인다. 면접관은 War Label을 면접자는 Fxxk Label을..


주 52시간 제도가 도입된 초기에 일이다.


나는 회사의 전략과 정책, 제도를 만드는 일을 했다. 부서별로 업무별로 케바케지만,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연구개발 부서의 경우 52시간을 초과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때 회사는 52시간 초과 근무를 시키면서 어떻게 52시간이 초과되지 않도록 제도적인(합법적으로 보이는) 관리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그 방법을 위해 짱구를 굴려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제안했고 현업에 적용했다. 어떻게 하냐고? 쉽다. 계획 공수와 실적 공수를 기반으로 가동률, 가득률 이런 걸 시스템적으로 관리하면 된다. 그리고, 실무자가 아닌 그들의 관리자와 또 그 상위 관리자를 관리하면 된다. 탑 매니지먼트에 그런 방법으로 리포트가 되면 현업은 알아서 돌아간다.


이걸 몇 주, 몇 개월 부서별, 개인별로 돌려서 부서장과 매니지먼트에 공유를 하면 재밌는 사실과 현상이 발견된다. 지속적으로 52시간에 근접하거나 초과하는 부서와 직무가 실재함이 사실로 밝혀진다. 그리고, 같은 부서원 대부분과 근무 시간이 현격하게 차이나는(더 많이 오래 근무하는) 몇몇이 눈에 띄게 된다. 이들은 넷 중에 하나다.


워커홀릭

워커홀릭의 오른팔

멍청한데 부지런한 인간(멍부)

멍청한데 부지런한 인간(멍부)의 오른팔 내지는 같은 멍부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일’ 중독이면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점은 쓸데 있는 ‘일’을 하는 사람과 쓸데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좀 과장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런데, 워커홀릭의 상당수조차 실제로는 쓸데없는 일(비생산적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의 일을 영어로 표현하면 ‘Duty’ 즉, 의무감이다. 여기에는 효율성도 없고, 효용성도 없다.




"Efficiency is doing things right; effectiveness is doing the right things."
(효율성은 일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고, 효과성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다.)
– Peter Drucker
"Never mistake motion for action."
(움직인다고 해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 Ernest Hemingway


그럼, 멍부는 차치하고 워커홀릭은 왜 그토록 일에 집착하게 됐을까? ‘1) 주변에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서, 2) 남들보다 내가 잘해서, 3) 일이 취미이자 특기여서, 4) 딱히 할 일이 없어서, 5) 안 하고 있으면 불안해서…’ 이 밖에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다섯 가지 이유를 다 합해도 일의 효율성과 효용성이 이로 인해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긴 어렵다.


그런데, 이런 워커홀릭이나 멍부가 한 사람이 아니라 팀, 조직, 혹은 회사 전체라면 어떨까? 나는 그런 회사를 겪어봤다. 그 회사는 Speed가 생명이라고 한다. 물론, Speed는 훌륭한 조직문화 중 하나 일 수 있다. ‘반복적인 일, 예측가능한 일, 숙련된 전문가가 하는 일’에 한 해서는 말이다. 그러나, ‘창조적인 일, 혁신적인 일, 비숙련자들이 하는 일’에 Speed는 Innovator Dilemma 일뿐이다. 미친 듯이 몰아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반복적인 일, 예측가능한 뻔한 일, 숙련된 일’은 딱히 분석이라 할 것도 기획도 필요 없다. 하던 데로 하다가 필요할 때 Process Innovation을 하던, 조직문화를 개선하던 소프트 스킬을 쓰면 된다. ‘창조적인 일, 혁신적인 일, 비숙련자들이 하는 일’에 ‘시행착오 환영!’이라는 거창한 Catch Phrase를 걸면 혁신 회사가 될 것이라는 착각에 헛웃음만 나온다. 왜 글로벌 빅테크들이 신사업을 위해서 수 억 원, 수십 억 원을 쓰며 컨설팅을 받는지 아는가? 그 수 억 원, 수십 억 원의 기회비용이 사업 손실보다 훨씬 적기 때문이다.


기획이 필요한 건, 당장 영업에서 팔 물건, 엔지니어가 개발하기 위한 화면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 아니라 Market Penetration을 위한 전략과 실행과제를 명명백백하게 하기 위함이다. 많은 회사들이 이를 위해 산업, 시장, 고객, 경쟁사 분석에 열을 올리는 데, 더 중요한 건 내부 역량 분석임을 모르는 회사가, 경영자가, 기획자가 너무나 많다. (이건 나중에 다른 글로 얘기하고..)


중요한 건 이 워커홀릭과 멍부가 넘쳐나면서 회사는 뭔가 벌릴 것처럼 하지만, 하는 일은 ‘Something that must be done’ 뿐이고 효용성도 효율성도 없다. 걍 뭘 하는 척만 한다. 뭘 하는 척만 해도 MOU 한답시고 사진만 찍어와도 So, Good!!이다.




개인이 일에 중독되는 건, 다른 정말 쓰잘 데 없는 데 중독되는 것보다 훨씬 더 건전하고 발전적이다. 그러나, 회사가 일에 중독되면 수많은 기회비용을 손실하게 된다. 그 기회비용의 손실은 그대로 회사와 직원들이 갖게 된다.


회사는 생산성, 효율성, 효용성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이윤을 추구해 가면 된다. 밤늦게까지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CEO들, 그리고, 관리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회사는 일에 중독되어서는 안 된다.



- 까칠한 펜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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