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말레이시아]Baba&Nyonya Heritage Museum
중국인의 동남아시아 이주 역사로 형성된
페라나칸(Perankan)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
<바바&뇨냐 헤리티지 박물관 Baba&Nyonya Heritage Museum>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중국계 건축, 사원, 음식, 의복, 언어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고, 차이나타운이 가장 번화한 지역인 경우도 많다. 지역적으로 가깝기 때문이라는 추정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왜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로 대거 넘어갔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정착하여 영향력이 큰 존재로 성장했는지는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중국 밖에 거주하는 중국계 사람을 흔히 화교(華僑)라 부르는데, 우선 이 용어부터 정리해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화교는 중국 국적을 유지한 채 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으로, 외국 현지 국적을 취득해 정착한 중국계 사람을 의미하는 화인(華人)과는 구분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글에서 말하는 동남아시아에 정착해 살아가는 중국인은 화인이라 표현해야 한다. 화인 중에서도 동남아시아 현지 문화에 깊이 융화되어 독특한 집단 문화를 일군 중국계 사람들을 페라나칸이라 칭한다.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서 영향력이 큰 존재로 성장하게 된 데에는 바로 이 페라나칸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역사를 밟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동남아시아에 정착하며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온 그들의 자부심 때문일까, 중국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했던 도시 중 하나인 말레이시아 말라카에는 페라나칸 가족이 실제 거주했던 집을 박물관으로 꾸민 곳이 있었다. 바바&뇨냐 헤리티지 박물관(Baba & Nyonya Heritage Museum)을 계기로 페라나칸의 역사와 근대 이후 중국인의 동남아시아 이주까지 기록에 남겨본다.
✔️ 중국인의 동남아시아 이주는 해상무역, 식민경제, 산업개발이라는 대내외적 질서 속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페라나칸은 그 정착의 산물이다.
✔️ 명칭: Baba & Nyonya Heritage Museum
✔️ 홈페이지: https://www.babanyonyamuseum.com/
✔️ 지역: 말레이시아 말라카
✔️ 위치: https://maps.app.goo.gl/Yeddjaoo8CW8ArtDA
15세기 초 명(明)은 정화(鄭和)의 대항해로 인한 막대한 재정 지출과 북원(北元) 등 북방 민족의 침입 등으로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동남아시아에서 해상 패권을 가져가려던 명은 당초 전략을 포기하고 해금(海禁) 정책으로 선회한다. 정화의 대항해와 같은 조공 무역조차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무역을 통해 성장한 시민들과 상인들의 니즈를 국가가 완벽히 통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고, 해금 정책은 다음과 같은 여러 이유로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첫째, 당시는 향신료 무역이 크게 증가하던 시기였는데, 말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과 필리핀을 점령한 스페인 덕분에 동남아시아-유럽-중국의 교역망이 갖춰지고 있었고, 동남아시아 항구도시들도 경제적인 이유로 중국 상인 유치를 위해 세금 감면 혜택 등을 제공했다. 둘째, 해금으로 인해 합법적 교역이 막히자 왜구 등이 해안을 습격하거나 밀무역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무역을 통해 먹고살던 중국의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국가 입장에서도 불법 무역과 해적 활동을 통제하기 위한 군사적, 행정적 비용만 증가하였다. 셋째, 시장에서 은(銀) 유통이 점점 증가하던 시기였지만, 무역이 막히면서 일본과 동남아시아로부터 들어오던 은 부족 문제가 심각해졌고, 은을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심지어 16세기 후반 명의 조세제도가 은 중심의 일조편법(一條鞭法)으로 재편되면서 은 수요가 폭증했는데, 이미 은 유통이 활발하던 동남아시아-일본-유럽과의 교역에 중국 상인들은 불법으로라도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중국은 1567년 민간의 해외무역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롱칭개해(隆慶開海) 조치를 발표한다. 오늘날 푸젠성(福建省) 장저우시(漳州市)의 항구 중 하나인 월항(月港)을 개방한 것이다. 합법적 무역 통로가 열리면서 푸젠성의 상인들은 합법적으로 교역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동남아시아로부터 향신료, 주석, 사탕수수, 약재, 은 등을 수입하였고, 중국 상인들은 비단, 도자기, 철기, 종이 등을 수출하였다. 이 시점부터 중국의 상인들은 무역을 위해 동남아시아에 거점을 마련했고, 일부는 정착하기 시작했다. 가장 번성한 항구였던 말라카 지역에서는 15세기말부터 중국인과 현지인 간의 통혼이 발생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이주가 시작한 시점은 16세기 중반 이후이다.
페라나칸은 말레이어로 후예, 자손을 뜻하는 단어이지만, 오늘날에는 동남아시아, 특히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지역에서 현대 이전(15~17세기 경)에 정착한 외국 이주민의 후손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주민의 대다수가 중국인 남성이었기 때문에 중국인 남성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을 주로 페라나칸이라 지칭한다. 말레이 반도에서는 중국계 페라나칸 남성을 바바(Baba), 중국계 페라나칸 여성을 뇨냐(Nyonya)라고도 부르는데, 이들을 통틀어 바바 뇨냐(Baba Nyonya)라고도 한다. 내가 다녀온 박물관의 이름이 Baba & Nyonya Heritage Museum인 이유이다. 바바는 페르시아어 baba(아버지)라는 단어에서, 뇨냐는 포르투갈어 Donha(귀부인)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 두 단어의 기원만 보더라도 외부 문화권과의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페라나칸이 점차 늘어나고 집단을 구축하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다. 먼저 언어부터 차이가 생겨났다. 말레이어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중국어가 대거 차용되어 문법과 억양이 변형된 형태로 사용했는데, 주로 말레이인 어머니가 교육을 시켰지만, 중국인 아버지의 언어가 섞이면서 '바바 말레이어'라는 새로운 언어가 탄생한 것이었다. 중국인과는 소통이 불가능한 차이였고, 현지 말레이인들과의 소통에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표준 말레이어, 표준 중국어, 영어를 사용하면서 바바 말레이어는 소멸 위기에 놓여있다. 두 번째로 음식 문화도 융합된 형태였는데, 중국식 조리법을 기반으로 말레이 음식에서 흔히 사용하는 향신료를 조합해 강한 향과 맛을 내는 음식이 많다. 예를 들어, 중국요리에서는 코코넛 밀크나 레몬그라스 같은 재료가 거의 쓰이지 않지만, 말라카의 대표적인 페라나칸 음식인 락사 르막(Laksa Lemak)은 코코넛 밀크 기반의 중국식 국수에 레몬그라스 등의 향신료를 넣어 만든다. 과거에는 주로 여성이 음식을 만들었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뇨냐 음식이라 칭하기도 한다. 가장 대중적인 페라나칸 음식으로는 페낭(Penang) 지역의 아삼 락사(Asam Laksa), 말라카(Melaka)와 싱가포르(Singapore)의 락사 르막, 아얌 부아 켈루악(Ayam Buah Keluak) 등이 있는데, 이 지역에 가면 뇨냐 음식 전문식당을 무수히 만날 수 있다.
세 번째로, 의상의 차이다. 말레이 지역의 전통의상 중 하나인 케바야(Kebaya)는 일상복으로 착용하기 때문에 면이나 얇은 실크 등을 소재로 비교적 단순하고 실용적인 재질에 절제된 문양을 사용한다. 반면 뇨냐 케바야(Nyonya Kebaya)에는 화려함과 섬세함을 극대화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중국식 수공 자수가 많이 사용된다. 하지만 현재 실용성 높은 일반 케바야는 여전히 일상복으로 많이 입지만, 뇨냐 케바야는 결혼식이나, 명절 등에만 입는 전통복장으로만 입는 옷이 되었다고 한다.
네 번째로 종교적으로도 차이가 있다. 말레이 현지인들은 대부분 이슬람을 받아들였지만, 페라나칸은 중국 전통신앙인 유교와 도교, 불교 등을 유지했다. 마지막으로 건축 방식의 차이인데, 가장 특징적인 점은 중앙 안뜰이다. 집의 중간에 작은 정원 형태의 뚫린 공간을 두어 깊숙한 내부까지 채광과 환기를 확보하고 뜨거운 열기를 순환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안뜰 주변에 가족들이 모이는 공용 공간을 배치하고 주변 벽과 바닥을 화려한 타일이나 조각으로 장식하였다. 건축물의 외형은 당시 식민지 시절의 영향을 받아 유럽식 형태가 강했지만, 내부에서는 페라나칸의 전통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 중국식의 화려한 가구와 신위(神位)를 모시는 제단, 독특한 채색과 문양의 도자기까지 그들만의 스타일을 발전시켜 왔다.
페라나칸이 동남아시아에서 자리를 잡게 된 이후 한번 더 중국인의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진다. 제국주의 열강이 동남아시아에 산업 개발을 시작한 19세기부터였는데, 당시 중국의 내부 경제적 요인과 대외적 요인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19세기 인구가 약 3억 명까지 증가하면서 토지 대비 인구 과밀이 심화되고 있었고, 특히 남부 연해의 푸젠성과 광둥성은 경작지가 부족해 해외 무역에 의존한 경제구조로 고착화되고 있었다. 16세기 이후 이주한 화교들이 이미 동남아시아에 정착해 현지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로 진출하는 것에 큰 어려움도 없었다.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동남아시아에서 주석광산, 고무와 설탕수수, 담배 플랜테이션을 개발하고 있었고, 향신료 무역에도 여전히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푸젠성과 광둥성 등 남부 지역 중국인에게는 기회가 열린 셈이다.
말레이시아 이포(Ipoh)와 태국 푸껫(Phuket) 등은 주석 광산으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 주변 지역과 세람반(Seremban), 인도네시아 팔렘방(Palembang) 등은 고무 플랜테이션으로, 인도네시아 메단(Medan)과 델리(Deli) 등은 담배 플랜테이션으로 개발된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이를 상업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항만 도시들에도 노동자가 필요했고, 싱가포르(Singapore), 페낭(Penang), 말라카(Melaka), 자카르타(Jakarta), 수라바야(Surabaya), 방콕(Bangkok) 등 주요 항구 도시에 중국계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9세기말 말레이 반도(현재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 이주한 중국인만 약 40만 명에 육박했고, 20세기 초까지 동남아시아 전역에 중국계 이주민은 약 2천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해외의 수요와 중국 내부의 공급이 일치하면서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또 하나의 큰 이유가 있었다. 식민 열강은 19세기 초부터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소위 조세농장(Tax Farming)이라 불린 징세청부업을 본격적으로 운영하였는데, 이를 주로 중국인에게 맡겼던 것이다. 징세청부업은 정부가 직접 세금을 징수하지 않고 징수 권한을 일정 금액을 받고 민간에 넘기는 제도로, 식민지에서의 행정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하는 동시에 징세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시행하였다. 식민 정부는 아편, 주류, 소금, 담배 등의 독점 판매권을 보유하였고, 도박장, 도축장, 시장, 항만 이용 등에 세금을 부과하였는데 이를 중국인들에게 운영권을 임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지인이 아닌 중국인에게 임대한 이유가 무엇일까? 16세기 이후 정착해 온 페라나칸과 근대에 온 중국인은 현지인에 비해 자본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납이 필요한 임대료를 납부할 수 있었고, 이미 오랫동안 교역을 바탕으로 한 유통망을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상대적으로 언어 능력(중국어, 현지어, 영어 등)도 우수하고, 주어진 역할에 책임감을 보여 식민 정부가 믿고 맡길 수 있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노동자를 관리하는 화교 지도자(Kapitan Cina)로 임명되면서 이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중간계층 역할로 자리 잡았다. 이미 정착해 있던 페라나칸도 이러한 변화에 동참하면서 동남아시아에서 더욱 영향력 있는 계층으로 성장해 갔다.
가장 유명한 페라나칸은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인 리콴유(Lee Kuan Yew)이다. 현재 싱가포르의 총리이자 리콴유의 아들인 리센룽(Lee Hsien Loong) 또한 페라나칸 혈통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페라나칸 출신들이 활약했지만, 페라나칸의 정체성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페라나칸에 대한 명확한 통계는 찾을 수 없었지만, 싱가포르의 페라나칸 박물관에서는 약 5만 명, 말레이시아 페라나칸협회에서는 약 20~3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태국 등에서도 페라나칸이 있었지만,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만큼 정체성이 강하지 않고, 그 정의도 달라 수치를 찾기 어려웠다. 현대로 오면서 점점 혈통을 정확히 구분하기도 어렵고, 페라나칸만의 커뮤니티 결속력도 약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는 박물관을 두고 문화유산으로써 건축물들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은 문화재로써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함인 것 같다. 단순히 두 가지 문화가 융합되어 특이하다는 것을 넘어, 해상무역, 식민경제, 산업개발 등의 복합적 요소가 교차하며 형성된 사회집단이었다는 점에 더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다녀온 바바&뇨냐 헤리티지 박물관 외에도 관련한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의 리스트도 남겨둔다.
1. Pinang Peranakan Mansion https://maps.app.goo.gl/GhpR1LcfEenR3E8f8
2. Peranakan Museum https://maps.app.goo.gl/FiWKJXw9nCYcEGP37
3. Peranakan Houses https://maps.app.goo.gl/m13tMhojJYxy2qP16
4. Phuket Peranakan Museum https://maps.app.goo.gl/yt83upi6zMFEr9HS8
5. Chinese Peranakan Library Museum https://maps.app.goo.gl/5RacERJyde1jmgN6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