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말레이시아] 로열 셀랑고르 비지터 센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성장의 근간이 된 주석
블러드 틴(Blood Tin)에서 로열(Royal)의 영광으로 승화하다
퓨터 제조 기업 <로열 셀랑고르>
오늘날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를 상징하는 것은 페트로나스 트윈타워(Petronas Twin Towers)이지만, 이 도시가 개발되기 시작한 계기는 땅속 깊이 묻혀 있던 회색빛 금속, 주석(Tin)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정글이었던 이 지역에서 막대한 양의 주석이 발견되면서 쿠알라룸푸르는 짧은 기간 내에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전 세계 산업화 과정에서 필수 광물이었던 주석을 캐기 위해 제국주의 열강들은 이 지역에 눈독을 들였고, 노동자들은 정글을 헤치고 이 지역에서 거주지를 마련하기 시작했던 것이 계기이다. 말레이시아의 성장의 근간이 된 주석산업을 보기 위해 내가 찾은 곳이 바로 로열 셀랑고르 비지터 센터(Royal Selangor Visitor Centre)이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설립한 박물관이 아닌 기업의 전시관이었지만, 국가적 위상에 못지 않은 그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 산업혁명의 윤활유이자 말레이 반도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었던 주석이 권위와 예술 작품로 승화되기까지, 로열 셀랑고르의 시선으로 따라가보다.
✔️ 명칭: 로열 셀랑고르 비지터 센터 (Royal Selangor Visitor Centre, 말레이시아어: Pusat Pelawat Royal Selangor)
✔️ 홈페이지: https://visitorcentre.royalselangor.com/
✔️ 지역: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 위치: https://maps.app.goo.gl/VWs3XRKJFCuN6R3Y9
19세기 유럽은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던 시기였다. 전쟁 중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 장기 보관이 가능한 식량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던 시기였는데, 1810년 영국은 철판에 주석을 얇게 도금한 양철(Tinplate) 용기를 사용하면 식량의 부식을 방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전쟁에서의 활용도도 높았지만, 도시화 과정에서 일반 노동자들의 가공식품 수요에도 대응할 수 있는 혁신적인 개발이었다. 지금도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통조림의 시작이었으며, 이는 식품 유통이 전 세계로 확장되는 계기도 되었다.
또한 주석은 구리와 합금하여 청동을 만드는 주 재료였는데, 청동은 산업혁명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 청동은 마찰계수가 낮아 강철 축과 맞닿아 돌아가도 기계의 파손을 최소화하였으며, 열팽창에 강하고 마모도 적어 내구성도 높았다. 그리고 해수에 강한 청동은 강철에 비해 훨씬 부식이 덜했기 때문에 프로펠러 등 선박의 밑부분에 사용되며 배의 수명을 비약적으로 늘렸다. 무엇보다 주조가 쉽고 가공성이 좋아 복잡한 형태의 기계를 정밀하게 만들기에 당시로서는 최적의 재료였다. 즉 주석은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돌아가게 만든 실질적인 에너지로 역할을 한 셈이다. 산업혁명을 시작하며 당시 최강국의 지위를 차지했던 영국은 이 광물을 놓칠 수 없었고 말레이시아를 주목하게 된다.
19세기 중반 말레이시아 페락(Perak) 주의 라룻(Larut) 지역에서 주석이 발견되는데, 이를 위해 중국 남부 푸젠성(福建省)과 광둥성(廣東省)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몰려들었고, 당시 페낭(Penang), 말라카(Melaka), 싱가포르(Singapore) 등을 이미 점유하고 있던 영국은 페락주까지 눈독을 들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쟁과 산업혁명으로 주석의 수요가 폭증하자 영국은 본격적으로 말레이 반도에 진출했고, 당시 수작업으로 주석을 캐던 중국인들에 비해 증기 펌프와 수압 채굴법을 앞세운 영국은 생산량을 압도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포착한다. 영국이 주석광산을 장악하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인들 간의 싸움에서 비롯했다. 주석 이권을 두고 당시 중국인들 간에 전쟁이 벌어졌는데(Larut War, 1861~1874), 이 때문에 주석 생산이 중단되는 일이 벌어지고,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영국이 군함을 이끌고 전쟁에 개입해 강제로 종식시킨다. 질서를 잡아주면 주석광산을 차지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었다. 1874년 팡코르 조약(Treaty of Pankor) 체결로 전쟁은 막을 내렸고, 덕분에 영국은 주석광산의 관리, 세금 징수, 토지 허가권 등 경제적 핵심 권한을 가지는 상주관(British Resident)을 파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주석을 캐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철도를 건설해 유통망도 장악했고, 제련소를 건설해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의 주석 원석까지 말레이시아로 가져와 제련함으로써 말레이 반도는 주석의 허브로 공고한 지위를 갖추게 된다.
주석광산의 발견으로 노동자들이 모여들고, 그로 인해 지금의 쿠알라룸푸르가 성장하게 되었지만, 주석에 대한 열망은 결국 말레이시아를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 놓이게 만들었다. 제국주의 시절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금광도, 다이아몬드 광산도 모두 유사한 과정을 겪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말레이시아 입장에서는 블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가 아닌 블러드 틴(Blood Tin)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주석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중국인들이 한참 넘어오던 1885년, 14세에 불과한 중국 소년 용쿤(楊堃, Yong Koon)도 있었다. 로열 셀랑고르의 설립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산에서 노동자로 일하거나 상업에 종사했던 반면, 그는 이미 중국에서부터 주석 세공 기술을 배우고 왔기 때문에 쿠알라룸푸르에서도 주석 세공에 몰두한다.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그는 1930년대 대공황과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주석을 공급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다. 당시 용쿤의 4명의 아들 모두가 각자 회사를 차려 독립했었으나, 셋째 아들의 회사인 셀랑고르 퓨터(Selangor Pewter)만이 살아남아 오늘날의 로열 셀랑고르로 이어졌다.
이 기업은 1979년 셀랑고르 술탄으로부터 '로열(Royal)' 칭호를 수여받게 되는데, 이는 왕실에 물건을 납품할 만큼 최고의 품질을 갖추었음을 술탄이 공식 인증한다는 의미이며, 기업을 넘어 국가적 자산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있음을 명하는 조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인증 덕분에 1992년 이 회사는 기업명 자체를 로열 셀랑고르로 바꾸게 되었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 기업은 현재 명실상부 전 세계 최고의 주석 제조 기업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건물 앞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주석 맥주잔을 두었고, 말레이시아의 상징인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도 주석으로 만들어 센터 내에 전시하고 있다. 주석 맥주잔은 로열 셀랑고르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1985년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로열 셀랑고르를 탐방하니 주석을 'Tin'이라 칭하지 않고 'Pewter'라 칭하고 있었다. Tin은 순수 주석 그 자체를 칭하는 용어인 반면, Pewter는 92~97%의 주석에 미량의 안티모니(Antimony)와 구리(Copper)를 섞어 만든 것이다. 물론 퓨터를 로열 셀랑고르에서 처음 개발한 것은 아니지만, 독성이 있는 납(Lead)을 섞어 만들던 과거에서 벗어나, 안티모니와 구리만을 섞어 현대적이고 안전한 무연 퓨터 공정을 세계적 표준으로 만들었다는 기여가 있기 때문이다. 주석으로 만든 식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도 로열 셀랑고르 덕분이다. 이에 대한 자부심으로 전시관은 퓨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퓨터에 대한 유명한 일화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일본군이 말레이 반도를 점령했던 시기에 이 지역은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아쿠앙(Ah Kuang)이라는 주민은 기근을 버티던 중 진흙 속에서 찻주전자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 주전자로 물을 끓이고 쌀죽을 만들어 먹는 등 유일한 조리도구로 사용했다. 수년간 진흙 속에 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식이 일어나지 않아 식기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열 전도율이 낮은 특성상 온기를 오래 유지할 수 있어 당시 전쟁 상황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도구였다. 전쟁이 끝난 후 아쿠앙은 이 찻주전자를 들고 로열 셀랑고르에 찾아왔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진흙에 방치되고, 수없이 가열하고 사용했음에도 주전자 바닥에는 선명하게 브랜드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제조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로열 셀랑고르는 이 제품을 아쿠앙으로부터 사들였다. 그래서 전시장에서도 바닥에 두지 않고, 바닥의 브랜드를 비춰서 보여주는 형태로 전시하고 있다. 가장 힘든 순간에도 로열 셀랑고르의 제품은 제 역할을 다한다는 브랜드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사례로, 가장 중요한 전시물 중 하나이다.
로열 셀랑고르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오스카 트로피가 퓨터(정확히는 퓨터의 한 종류인 브리타늄(Britannuim))로 제작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로열 셀랑고르가 트로피를 직접 제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 중 하나인 오스카에서 자신들의 주력 분야인 퓨터를 사용한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로열 셀랑고르가 직접 제작한 트로피도 많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중국에서 개최된 F1 그랑프리(F1 Grand Prix) 경기의 트로피를 여러 차례 제작하였으며, ATP 상하이 마스터스 1000의 트로피, LPGA 말레이시아의 트로피들도 로열 셀랑고르의 작품이다.
현재는 전 세계 유명 IP를 활용한 전시물도 다양하게 제작하고 있다. 스타워즈, 마블, DC, 서유기 등과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진화하며 전통 기술이 현대의 소비 시장에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수작업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란 생각이 들만큼 정교한 피규어들이었다.
현장에서 주조(Casting), 연마(Polishing), 해머링(Hammering) 등의 제작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이곳의 큰 장점이다. 당연하게도 다른 주석 공장들은 자동화가 되었겠지만, 로열 셀랑고르는 여전히 약 250여 명의 전문가들이 근무하며 수작업을 고수하고 있다. 이 전통적인 수작업 자체를 브랜드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금속 틀에 퓨터를 붓는 주조 작업은 물론, 거친 표면을 깎고 매끄럽게 다듬는 연마 작업, 요철 문양을 만드는 해머링 작업, 페인팅과 각인까지 거의 모든 과정에서 장인이 직접 진행하고 있다. 결과물을 보면 그 작업 과정 하나하나가 얼마나 정교한 손길을 거쳤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