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말레이시아] Cheng Ho Cultural Museum
말레이시아의 말라카(Melaka) 시내를 걷다 보면 유럽식, 중국식 건축물은 물론,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까지 너무 쉽게 만날 수 있다. 여전히 종교 분쟁과 인종간 갈등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가장 다양성이 융합된 도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이유는 지리적 요충지라는 이점도 있었지만, ‘정화(鄭和; Cheng Ho)’라는 중국인 환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도 아닌 말레이시아에서, 말라카 왕국의 창업군주인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도 아닌 중국인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넘어 정화(鄭和)라는 인물을 통해 동양의 대항해와 말라카의 해상무역을 조명하다.
✔️ 명칭: Cheng Ho Cultural Museum (말레이어: Muzium Budaya Cheng Ho)
✔️ 홈페이지: https://www.chengho.my
✔️ 주소: https://maps.app.goo.gl/BHPhrfucx8VuTS7E9
우리는 흔히 “대항해 시대”라고 하면 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같은 유럽의 탐험가들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이른 1405년, 명(明)나라의 정화는 이미 200척 이상의 대규모 선단에 27,800여 명의 인원을 이끌고 동남아시아, 인도, 중동, 심지어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항해를 다녀왔다. 콜럼버스가 3척의 배로 120여 명과 함께 대서양으로 떠났던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큰 규모이다.
그의 항해는 무려 7차례, 28년간 이어졌고, 단순한 탐험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 영락제의 명을 받아 외교사절단의 역할을 수행한 국가 프로젝트였다. 유럽의 탐험과 항해가 교역으로 시작해, 약탈과 식민지배로 이어진 반면, 정화의 원정은 명나라의 존재와 황제의 위대함을 세계에 알리는 목적만이 있었다. 침략해 식민지로 삼거나 노예를 거느리지도 않았다. 방문한 국가에 조공만을 요구했고, 실제로 아프리카로부터 사자와 기린 등을 가져오기도 했다. 대신 명은 차와 비단 등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 1순위 품목들을 전달하였다.
당시 세계 최강국인 명나라가 유럽과 같은 목적으로 항해를 시작했었다면, 15세기 이후의 세계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상상해 보게 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Gavin Menzies는 정화가 1421년 호주와 북아메리카에 먼저 도착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2003년 호주를 방문한 후진타오 주석은 의회 연설에서 정화의 원정대가 호주에 도착한 적이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학계에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지만, 사실이라면 전 세계 역사책 모두가 바뀌어야 한다. 사실이 아닐지라도 유럽의 그 어떤 탐험보다 엄청난 대항해를 선도했음은 분명하다.
말라카는 정화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시암(현재 태국)과 자바(현재 인도네시아) 등 주변국들의 위협 속에 있던 변두리 항구 도시에 불과했다. 이 도시에 전환점을 준 것이 바로 정화의 도착이다. 정화는 말라카가 일개 항구가 아니라 분명한 나라임을 밝히는 비석을 세운 것이다. 말라카의 통치자 파라메스와라를 왕으로 공식 인정하며 명의 조공체계에 편입시켰고, 덕분에 명의 보호 아래 말라카는 정치적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말라카 지역은 계절풍이 시작되고 끝나는 말라카 해협에 위치해 있어 배가 정박하기에 용이하고, 말라카 강을 통해 선박이 내륙으로 들어가기 좋은 지리적 이점을 지닌 곳이다. 이를 꿰뚫어 본 파라메스와라는 적극적으로 해상교역에 참여했고, 그 덕에 중국은 물론, 서아시아, 인도, 말레이 군도 등에서 상인들이 몰려들며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런 흐름은 말라카가 중국·인도·아랍·말레이 등 다양한 문화가 섞이는 국제 도시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고, 훗날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으로 이어지는 유럽 열강이 탐내는 핵심 무역항으로 이어졌다.
정화는 7번째 항해 도중 인도 Calicut(현재 Kozhikode)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함대는 복귀했고 더 이상의 항해도 없었다. 정화라는 걸출한 리더십의 부재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명의 국내외 상황이 녹록지 않았던 영향이 크다.
영락제의 지원과 정화의 대항해로 명은 외교적 영향력을 전 세계로 확대하는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지만, 대항해로 인한 막대한 재정 투입만 있고 실익은 없다는 이유로 유학자들이 반대하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로도 북방 민족의 침입을 대비할 필요성이 있었다. 결국 1433년 이후 해금(海禁) 정책으로 선회하였고, 스스로 바닷길도 버리고 동남아시아에 대한 해상 패권도 포기하였다. 명나라의 보호 아래 해상무역의 교두보로써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말라카 또한 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명의 보호막이 없어진 이후 말라카의 번영은 채 100년을 넘기지 못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말라카 술탄은 명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누구도 바다의 패권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해상 실크로드의 거점이었던 말라카는 포르투갈(1511~1641), 네덜란드(1641~1824), 영국(1824~1957)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말라카에서는 곳곳에서 정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말레이시아-중국 우호를 기념하는 식수광장에 있는 비석에는 정화의 배가 그려져 있고, 정화의 함대와 함께 온 중국인들이 정착해 살던 지역인 Bukit China(현재는 묘지가 자리하고 있음)에는 정화를 신격화해 모시는 Poh San Teng Temple(도교 사원)이 있다. 바로 옆에는 정화와 함께 말라카로 온 중국 공주인 Hang Li Poh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우물도 있다(중국에서는 공주가 아닌 궁녀로 보고 있다). 현지인에게는 '정화 우물'로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말라카에는 정화의 발자취가 가득하고, 이를 총아해 기념하고자 만든 곳이 이 박물관이다. 정화의 대항해 600주년을 기념하여 정화가 실제 창고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터에 2005년 설립하였다. 작은 박물관이지만, 정화의 대선단과 당시 주민들의 생활상을 구현한 디오라마, 상세한 항해 코스, 정화 이후 말라카의 도시 모습, 명나라 시대의 유적까지 15세기 말라카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만큼 말라카는 어디를 가도 눈길을 사로잡지만, 이 박물관은 유럽식 사관에 익숙해진 세계사에 정화라는 새로운 인물을 느껴볼 수 있는 색다른 기회를 제공해 주는 곳이다.
인도네시아에도 정화의 방문을 기념해 만든 모스크가 있다. 주변의 해적을 소탕하면서 무슬림과 중국인 공동체를 건설하여 이후 중국인 이주에 큰 기여를 했다고 알려져 있어 이를 기리기 위함이다. 팔렘방(Palembang), 수라바야(Surabaya) 등에 있고, 중국과 이슬람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1) Al Islam Muhammad Cheng Hoo Sriwijaya Palembang Mosque
https://maps.app.goo.gl/oCwueqQQN3pEyg9R9
2) Muhammad Cheng Hoo Mosque https://maps.app.goo.gl/qayxC6kDkQieGsuK6
정화는 물론 중국에서도 걸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정화가 태어나 자란 윈난성 쿤밍시(昆明市)와 정화의 함대를 건조한 장쑤성 쑤저우시(苏州市)에 가면 정화공원(郑和公园)이 있다.
3) 윈난성 쿤밍시 정화공원 https://maps.app.goo.gl/Cb3yHZz7CyGknap96
4) 장쑤성 쑤저우시 정화공원 https://maps.app.goo.gl/Gcz2P7fbYD6st8gr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