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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Aug 04. 2023

바다 건너의 또 다른 가족에게, 치즈케이크

EP.6 언어는 달라도 진심은 통한다


젊음이란, 또 다른 이름의 용기라고 생각한다.

혈혈단신으로 일본에 가게 되었던 청년기의 나 또한 그처럼 용감했다. 2005년,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1년 간 일본에서 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목적지가 일본이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너는 펫'이라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본 드라마에 빠졌고, 그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이라는 나라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거의 역사부터 현재의 국제 정세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지만, 그 당시에는 한류 열풍으로 한국인에게도 호의적인 시기였다. 게다가 엔저로 인해 환율이 700원 대로 저렴해서 생활에도 부담이 덜했다.


결혼 전까지 독립은 절대 안 된다는 부모님의 반대도 나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출국하던 날, 온 가족이 인천공항에 가서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가족사진을 한 장 찍은 뒤에, 출국장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엄마는 어린 시절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차 조심하고'로 시작하는 그 걱정 어린 잔소리를 마지막까지 덧붙였다. 그렇게 가족들의 우려를 뒤로 한 채, 스물셋의 나는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으로 가는 길


인천공항에서 나리타공항까지는 2시간 20분. 인생 처음으로 홀로 타국 땅에 발을 디디고 나서야 한국을 떠나왔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손에는 홈스테이를 하기로 한 가정의 주소 한 장이 들려있었다.

고등학교 제2외국어 선택 과목이 일본어였음에도, 일본 문화원을 8개월간 다닌 것이 언어 공부의 전부였던 내가 유창하게 일본어를 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당시 내 일본어 실력이라고 하면,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모든 결론이 '家で寝ます。(집에서 잡니다)'로 끝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존 본능이 매우 뛰어난 인간이었다. 지하철 승차권 발권기 앞에 서서 용감하게 지나가는 아저씨를 붙잡고 말을 걸었다. 아저씨는 친절하게도 승차권을 직접 발권해 준 뒤, 잔돈을 잘 챙기라며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렇게 긴 일본어를 내 입으로 말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일본 도착 첫날 오로지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어린아이의 말문이 터지듯 나는 언어의 수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한 번 용기를 내기 시작하자, 나는 그곳이 일본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옆 사람에게도 말을 걸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여기로 가려고 하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아,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일본은 처음이에요.'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여 스몰토크로 연결하는 식이었다. 역시, 사람은 위기에 봉착하면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진리를 이렇게 증명해 냈다.


홈스테이를 하게 된 가정의 가족 구성원은 이러했다. 먼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 두 분의 딸과 사위, 그리고 그들의 딸, 이렇게 3대가 함께 살고 있었다. 첫 만남의 긴장도 잠시, 가족들은 나를 매우 반겨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아, 한 사람만 빼고. 이 집의 데릴사위인 사이토 아키라 씨는 보통의 일본인과는 다르게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듬직한 덩치를 가진 사람이었다. 트럭 운전수인 그는 구릿빛 피부에 무뚝뚝한 표정 때문에 유독 다가가기가 어려워서, 나는 아키라 씨를 무서워했다. 그의 부인이자 이 집의 딸인 사이토 키요미 씨는 매우 발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크고 예쁜 눈에, 입은 다소 돌출되어 있었는데 그 때문에 그녀의 딸은 그녀를 '뎃빠상(でっぱさん, 뻐드렁니씨)'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둘의 딸인 사이토 카나는 12살의 귀여운 꼬마 숙녀였다. 예의범절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란 나에게 카나는 다소 버릇없는 아이처럼 비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맑기 그지없는, 조부모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그런 아이였다.

아버지인 사이토 슈우지 씨는 조금 특이한 캐릭터였다. 그는 오랫동안 철판프레스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였다. 당시에도 60세가 넘었는데, 한결같이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소주에 토닉워터를 타먹는 것을 삶의 낙으로 여기는 분이었다. 때때로 사장님의 집에 가서 마작을 즐기기도 하고, 장난기가 너무 넘쳐 부인에게 욕을 먹어도 껄껄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분이었다. 손녀인 카나는 그를 '카루 오지상(カール おじさん, 컬아저씨)'이라고 불렀는데, 일본 과자 브랜드인 카루(カール)에서 따온 별명이었다. 여담이지만, 정말 외모가 똑 닮아서 나는 어쩌면 카나가 네이밍의 귀재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 : 메이지 홈페이지 / 카루의 캐릭터 '카루 오지상'. 아버지와 말투 마저 똑같다.

마지막으로 이 가정의 파워 실세, 사이토 아키코 씨는 남편보다 세 살 많은 연상이었다. 매우 작고 아담한 체구에 야무진 외모를 가진 그녀는 가정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다. 집안의 최고 어른답게, 그녀의 말투는 부드럽지만 강인했다.


이처럼 개성 강한 5인이 살고 있는 집은 일본 전통식의 타다미방 하나, 일반방 하나, 그리고 미닫이문이 달린 방 하나, 이렇게 3개의 방이 있는 작은 맨션이었다. 내가 묵게 된 방은 미닫이문이 달린 방이었는데, 카나는 그곳을 나와 함께 사용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그날로 둘도 없는 자매처럼 매일 붙어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스티커 붙이기 놀이를 하거나, 잠이 들 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카나는 늘 '지욘'이라고 내 이름을 부르면서도, 다른 이에게 나를 소개할 때는 '우리 언니'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카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든든한 목소리로 '내 동생 잘 부탁해!'하고 인사를 했다.


진짜 가족이 되다


사실 처음 두 달 정도는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아 전체 대화의 20% 정도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화 도중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거나, 바디랭귀지로 소통을 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즉석에서 번역이 되는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그때는 정말 그랬다.

내가 살던 카츠시카구의 미즈모토라는 곳은 도쿄 중심부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살고 있지 않았다. 가족이나 친구와 통화를 하지 않는 날이면, 하루종일 한국어를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보니 일본어 실력은 빠르게 향상되어 갔다. 더불어 한국어를 잊어버리는 속도도 그만큼 빨라지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지만.

대화도 통하게 되고, 마음을 열어 서로를 알아가게 되면서 나는 자연스레 아키코 씨와 슈우지 씨를 어머니와 아버지, 키요미 씨와 아키라 씨는 언니와 오빠로 불렀다. 카나는 여전히 나를 지욘, 또는 언니라고 소개해 이상하게 꼬인 족보였지만 어찌 되었든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일본에서 발급받았던 각 병원의 진료증과 당시 사용하던 휴대폰. 아버지 덕분에 나는 외국인임에도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원래 홈스테이를 하게 되면 월세의 개념으로 생활비를 부담해야 했지만, 사이토 가족은 나에게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계절마다 새로운 이불과 옷을 사주고, 용돈까지 주셨다. 아버지는 날이 점점 쌀쌀해지자 이불 안에 넣고 자라고 퇴근길에 온열기를 사다 주셨다. 어머니는 장을 봐올 때마다 내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을 먹여주고 싶다며 온갖 식재료를 가득 사 오셨다.

집 근처의 몬쟈야키 식당에서 외식을 했던 날도 떠오른다. 오빠는 그날 어릴 때 이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며 능숙하게 몬쟈야키를 만들어주었다. 오코노미야키보다 식감이 훨씬 부드러워서 든든하게 먹고 배를 두드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던 밤이었다.

항상 받기만 하는 것이 미안해서, 나도 일본의 가족들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다. 그 당시 엄마가 직접 담근 김치를 종종 보내주셨는데, 그 김치가 도착하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김치부침개를 부쳤다. 아버지와 오빠는 술안주로도 너무 좋다며 늘 세네 접시를 뚝딱 비웠다.


저녁 9시가 되면,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 아버지와 오빠는 각자 소주와 맥주를 한잔씩 하고 일찍 잠에 들었다. 그러고 나면 여자들끼리 코타츠로 옹기종기 모여들어 다리만 쏙 집어넣고는 차와 함께 귤을 까먹으며 드라마를 봤다. 일본에서는 드라마 한 편당 삽입되는 중간 광고가 10분 정도였는데, 그 사이에 카나와 나는 간식거리를 사러 집 주변 편의점에 다녀오곤 했다. 여름에는 아이스크림, 겨울에는 어묵 같은 것들을 사다 날랐는데,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업어주기 놀이를 하면서 서로 깔깔거리고 웃던 날들도 기억이 난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키라 오빠와는 꽤 서먹서먹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산리오 테마파크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자기가 이렇게 우락부락해 보여도, 사실은 상당히 '메르헨(동화를 뜻하는 독일어)'한 사람이라며.

산리오 퓨로랜드에 갔던 그날, 오빠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눈을 반짝이며 12살인 자신의 딸보다도 더 신나 하는 모습에 언니도 나도, 그리고 카나도 한참을 웃었다.

아키라 오빠는 '츤데레'라는 말에 딱 적합한 사람이었다. 오후의 홍차라는 밀크티 음료와 치즈케이크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무심한 척 냉장고 한 칸을 통째로 비워 그것들로 채워놓고는 '여기는 네 칸이니까 다 먹으면 얘기해.'라고 하는 것이 오빠의 애정표현 방식이었다. 오빠 앞에서는 지나가는 말이라도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1년에 한 번씩은 꼭 일본 가족들을 만나러 갔었는데, 제일 먹고 싶었던 것이 뭐였냐고 물었다. 타코야키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오빠는 아사쿠사의 카미나리몬 앞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타코야키 노점에서 혼자 다 먹으라며 맛별로 30알을 사줬다.


산리오 퓨로랜드에서 카나와 함께. 사진은 키요미 언니가 찍어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번은, 저녁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에 오빠가 치즈케이크를 사주겠다며 같이 나가자고 했다.

따라간다는 카나는 집에 있으라며 떼어 놓고, 차로 15분쯤 떨어진 빵집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오빠가 먼저 말을 꺼냈다. 도쿄의 미나토구가 고향인 오빠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일본의 가장 북쪽에 있는 홋카이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혼자 지냈다고 했다. 그렇게 극심한 외로움으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자신은 그래도 언어가 통하는 곳에 있었으니 나보다는 나았을 것이라고 했다. 바다를 건너 타국에 온 나의 외로움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도 안된다며, 대단한 용기고 존경스럽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너는 혼자가 아니고, 이젠 여기에도 가족이 있으니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야기하라며, 얼마든지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차 안에서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이토록 따뜻한 위로라니. 게다가 아키라 오빠에게서 그런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늘 투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음속에는 소녀 감성을 지닌 세심하고 따뜻한 사람이 아키라 오빠의 본모습이었다.


또 오빠는 종종 아르바이트를 시켜준다는 핑계로 카나와 나를 자신의 업무용 트럭에 태워주곤 했다. 한 번은 양파를 실어 날라야 하는데, 간 김에 요코하마 구경도 시켜준다고 했다. 나는 그날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요코하마에 가기 2주 전, 혼자 집을 보고 있다가 장을 보고 돌아온 어머니의 짐을 들어드리려고 현관으로 달려 나갔는데, 그대로 미끄러져 꼬리뼈를 다치게 되었다. 혼자서 일어날 때의 힘듦은 차치하더라도, 웃거나 재채기를 하거나 하는 신체의 작은 흔들림에도 나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런 나에게 화장실에서 복부에 힘을 가하는 일은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었다. 얼굴은 점점 누렇게 떠가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가족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퇴근하면서 약국에 들러 관장약을 사 오셨고, 언니는 외출했다가 돌아오면서 변비에 좋다는 푸룬젤리와 캔디를 사다 주었다. 어머니는 푸룬주스를 잔뜩 사 오셔서는 걱정 어린 얼굴로 컵에 가득 따라주셨다. 오빠는 화장실에 못 가면 요코하마도 못 간다며 배변활동에 압박을 가했고, 카나는 내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면 문 앞에 서서 '지욘!! 힘내!!!'라며 가열찬 응원을 보냈다.

온 가족의 염원에 힘입어 나는 약속의 그날을 하루 남기고 드디어 큰일을 해냈다.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용변을 보고 칭찬을 받은 것은 아마 유아기 시절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렇게 다음날 아침 일찍 요코하마로 출발할 수 있었다. 물론, 꼬리뼈가 완벽하게 나은 상태는 아니어서 트럭이 한 번씩 덜컹일 때마다 악을 내질렀지만 말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버지는 선물로 내가 좋아하는 새우를 꼭 사주고 싶다며 가족들과 함께 도쿄의 최대 수산물 시장인 츠키지시장에 데리고 갔다. 여기서 가장 싱싱하고 비싼 녀석으로 골라 달라며 대하 한 박스와 참치 등을 가득 사서 돌아와 우리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볶음우동와, 대하 소금구이, 참치뱃살로 풍성한 식탁이 차려졌다. 아버지는 야무지게 새우 껍질을 까는 나를 보고는 '에비다이스키온나(えび大好き女, 새우를 사랑하는 여자)'라는 긴 별명을 지어주었다가, 이내 '에비온나(えび女, 새우녀)'라고 짧게 정정했다. 새우를 양손에 들고 신나게 먹고 있는 나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껄껄 웃으며 소주에 토닉워터를 타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립다.


새해가 되자 우리는 일본식과 한국식으로 떡국을 끓여 먹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안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아쉬움과 그리움이 진하게 우러난 육수를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난 뒤에 봉투 하나를 내미셨다. 안에는 4만 엔이 들어있었다. 한국행 비행기 티켓은 아버지가 사주고 싶었다며, 일본으로 올 때의 비행기 티켓값도 내주시겠다고 하셨다. 이미 받은 것이 넘치게 많아 극구 사양하자, 네가 내 딸이니까 주는 것이니 넣어두라 하셨다.


한국으로 기나긴 여행을 떠나왔다


일주일 후 한국을 떠나올 때 우리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의 가족 또한 나리타 공항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가족사진을 한 장 찍었다. 출국장 앞에서 아쉬움에 발이 떨어지지 않아 가족들과 부둥켜안고 울다가, 내 이름을 부르는 안내방송 소리를 듣고서야 뒤돌아 설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물을 연신 훔쳐내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휴대폰을 새로 개통할 때까지, 종종 일본에서 집 전화로 전화가 걸려왔다. 보통은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는데, '네 어머니는 매일 눈물바람이다. 너는 한국으로 여행을 간 거야. 그렇지? 언제 돌아오니?'라고 말씀하곤 하셨다. 여행이 너무 길다며, 한국으로 간 막내딸이 너무 보고 싶다고도 하셨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먹먹해서 나 또한 눈물바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일본 가족과 함께 한 덕분에 한국에 돌아와 진로 고민의 오랜 방황을 끝내고 일본어학과로 편입을 했다. 일본어를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가족들은 한국으로 국제택배도 자주 보내주었다. 큰 박스가 집으로 배송되는 날이면 한국의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열어보았는데, 그 안에는 내가 좋아하던 일본의 먹거리들과 작은 선물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가족들의 사랑이었다.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을 안고 1년을 살다가, 휴가 기간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일본으로 향했다. 내가 올 때쯤이 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계절에 맞춰 또 새로운 잠옷과 이불을 준비해 주시고, 오빠는 이번엔 뭘 사 먹일까, 그리고 카나는 뭘 하고 놀지를 고민했다. 특히 키요미 언니는 일본 국민 그룹인 아라시의 팬이었던 나를 위해 팬클럽 가입까지 했다. 신규회원일 경우 콘서트 앞자리를 선점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언니를 제외하고 어머니와 카나, 그리고 나는 모두 아라시의 팬이었는데, 언니 덕분에 2007년 여름에는 요코하마 아리나에서 열렸던 아라시의 나츠콘(夏コン, 여름 콘서트)을 두 타임이나 관람할 수 있었다.


2011년 3월, 재앙으로 다가왔던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는 가족들과 연락이 끊겨 이제 모든 것이 추억이 되어 버렸지만, 아직도 가끔은 일본의 가족들을 꿈에서 만나기도 한다. 그런 날에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발을 동동 구르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일본통이었던 지인을 통해 가족들을 수소문해보기도 했지만, 내가 살던 미즈모토는 인근의 미즈모토 공원이 방사능 관리구역으로 지정되어 출입이 통제되었다는 소식만이 돌아왔다. 그곳은 아버지, 카나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종종 꽃구경을 가던 곳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일본의 가족들이 너무나 그립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따뜻한 집밥과, 아버지가 투박한 손으로 끓여주시던 일본식 수제비 스이통, 가족인데 뭐 어떠냐며 팬티바람으로 돌아다니던 아키라 오빠의 모습과, 또 다른 별명인 센타쿠바바(洗濯ばば, 세탁 아주머니 - 언니는 가족들의 빨래를 담당해서 이 같은 별명으로도 불렸다.)처럼 빨래바구니를 들고 종종거리던 유쾌한 키요미 언니, 그리고 옆에 꼭 붙어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지욘, 지욘 하며 내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던 카나까지.

한국에 꼭 놀러 오겠다던 가족들의 약속은 지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지만, 여전히 그들은 내 마음속의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Google Map으로 찾아본 내가 살던 맨션. 일본의 가족들은 여전히 여기에 살고 있을까.


어디에선가 잘 살아가고 있기를. 그래서 언젠가는 함께 예전처럼 옹기종기 발을 모으고 앉아 차와 함께 치즈케이크를 나누어 먹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떠올리면 더 이상 마음 아프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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