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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Mar 21. 2024

섣불리 오해하지 않기로 해요

1층 아주머니는 무서운 사람이 아닙니다.

  이 동네로 이사하던 날, 아랫집 아주머니와 다툼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다툰 것은 아니고, 에어컨 설치기사와 아주머니 간의 말다툼이었다. 작은 방의 실외기 설치 위치가 마땅치 않아 고민하던 기사님은 1층 실외기 옆에 나란히 설치하면 되겠다고 이야기했다.

기사님이 밖으로 나가고, 정리를 기다리는 짐을 바라보며 가벼운 한숨을 짓고 있던 내 귀에는 두런두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이윽고 점차 높아지더니 이내 참을 수 없이 큰 소음이 되어 귀에 꽂혔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기사님과 1층 아주머니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이사 첫날부터 이게 웬일이람. 꼬장꼬장한 이웃을 만난 것 같아 앞으로의 생활이 걱정되었다.


  나중에 내막을 알고 보니, 기사님이 설치하려던 그 위치는 1층 베란다를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주머니 입장에서는 낯선 사람이 개인의 공간을 침범한 것이었으니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얼른 내려가 미리 여쭤보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했고, 아주머니도 금세 마음을 풀고 이사 첫날부터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고 사과하셨다.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고 나서 얼마 뒤, 아주머니는 연잎밥 세 덩이를 들고 올라오셨다. 연이어 미안하다며 그 귀한 연잎밥을 손에 쥐어 주시고 돌아가셨다. 아주머니의 마음을 손에 들고는 '꼬장꼬장한 이웃'이라고 섣불리 오해해 버린 내가 너무 부끄럽고 죄송했다.


  그 뒤로도 아주머니는 마주치기만 하면 먹을 것을 나눠주셨다. 어느 날은 직접 만든 조청을, 또 어떤 날은 직접 말린 사과칩 같은, 정성이 담긴 음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또 주섬주섬 과일을 챙기거나, 직접 구운 당근 머핀을 손에 들고 1층 현관문을 두드렸다. 살가운 인상은 아니지만, 몇 마디만 대화를 하다 보면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슬슬 매트를 깔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찾아왔다. 여기저기 쿵쿵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는 탓에, 아이의 안전뿐만 아니라 아랫집에 소음을 유발할까 신경이 쓰였다. 아이가 생활하는 방은 전체를 매트로 덮었지만, 그 외 주방과 다이닝룸에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어 다녔다. 하지만 점차 커가는 사내아이의 활동성은 내가 주의하고 훈육한다 해서 통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요즘 내가 아이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뛰지 마!"가 되었음에도, 신이 난 아이는 까치발이라도 들고 뛴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아랫집이 없는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하나 싶은 고민이 퐁퐁 솟아오르곤 한다.


  최근의 일이었다. 어린이집 하원을 하고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1층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인사를 건네며 아이에게 "매일 쿵쿵 뛰어서 죄송합니다, 해야지"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는 배에 두 손을 포개 얹고는 허리를 숙이며 "죄송합니다!"하고 인사했다. 아주머니는 웃으며 "아이 키우는 집이 다 그런 거지, 뭐! 괜찮아요~"라고 이해의 말로 답해주셨다. 그 말씀이 어찌나 감사하던지, 아이가 뛸 때마다 1층 아주머니가 이놈! 하면서 올라온다고 협박을 했던 것 또한 죄송해졌다.

  그때 불현듯 이사 첫날 앞서 말했던 소란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여동생의 말이 떠올랐다. 

여동생은 요리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데,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듣고는 자기가 아는 사람인 것 같다고 했었다. 언젠가 쓰레기더미에서 학원 쇼핑백을 봤다며, 혹시 기회 되면 물어보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래전에 그 학원을 다녔다고 했다. 강사 얼굴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동생의 외모를 설명하는 나의 말을 듣고는 맞는 것 같다고도 하셨다. 세상 참 좁네요, 간단히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여니 1층 아주머니가 손에 또 뭔가를 들고 계셨다. 편강을 좀 만들었다며 건네주시고는, 보관방법도 설명해 주셨다. 세상에, 이 귀한걸.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니 핸드폰을 들어 사진 한 장을 보여주셨다. 

"혹시 이 분이 동생분 맞아요?"

"어머, 맞아요!"


그 사진 속에는 아주머니와 내 동생이 나란히 서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5년도 지난 일이라는데, 신기한 인연에 나는 들어오시라는 인사도 잊은 채 현관문을 활짝 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시던 3층 아주머니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신나게 하나며 대화에 합세했다. 아이는 어느새 신발을 신고 나가 1층 아주머니 곁을 빙글빙글 돌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처음 이사 올 때는 겨우 기어 다니던 아기가 언제 이렇게 컸냐고, 그런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주머니들이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대화를 하며 나는 그 풍경이 참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요즘 세상에 이런 풍경은 낯설면서도 그리운 것이었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 평온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전에 드렸던 당근 머핀을 정말 맛있게 드셨다기에, 나는 아주머니가 주신 편강으로 레몬진저쿠키를 만들어 드리기로 했다. 따뜻한 이웃을 만나 감사한 마음을 가득 담아. 그리고 그 간의 섣부른 오해로 죄송했던 마음에 사과의 마음 또한 얹어서 차 한 잔에 딱 어울릴 쿠키를 만들어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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