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심적 방황의 한가운데서 운명처럼 만난 우리
아주 작은 먼지처럼 존재하던 베이킹과의 첫 만남을 끄집어내기로 한 일은 어쩌면 큰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 시작은 나의 힘들었던 과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당시 숱한 연애의 실패로 심신이 지쳐있던 나는, 마침 베이킹 공방을 오픈한 친한 언니의 작업실에 들렀다. 아마도 국내 최초였을, 캐릭터 롤케이크를 만든 것이 나의 베이킹 첫 경험이었다.
재료를 계량하고, 계란 흰자에 거품을 일으켜 머랭을 만들고, 그 머랭이 꺼지지 않도록 신속하고도 섬세하게 가루 재료를 섞어 반죽을 만든 뒤에, 식용색소로 조색을 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나에게 매우 신성한 일처럼 느껴졌다.
더불어 생크림을 가득 품은 예쁜 캐릭터 롤케이크를 내 손으로 만들었다는 그 사실 자체로, 베이킹을 하는 시간이 안겨주는 힐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직접 만든 퐁신한 롤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실패한 연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015년의 나는 우연하게도 심적 방황의 한가운데서 운명처럼 베이킹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내가 베이킹에 이렇게나 진심이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베이킹에 대한 강렬한 감정은 잊어버린 채, 매일의 삶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다 앞서 말한 친한 언니가 새로운 클래스를 오픈한다는 소식을 듣고 캐릭터 마카롱 클래스를 신청하게 되었다.
알록달록 귀여운 색감의 캐릭터로 마카롱이라니! 가히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신선한 충격을 안고 들었던 클래스는 그다음 달의 캐릭터 돔케이크 원데이 클래스 수강으로 이어졌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나는 어느새 베이킹의 세계로 점점 더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 여담이지만, 그 친한 언니는 이제 여러 차례 매스컴을 타서 베이킹계에서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클래스를 진행하는 동안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언니는, 나에게 슈거 크래프트를 한번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넌지시 이야기를 던졌다. 설탕 반죽으로 케이크 위에 장식을 만들어 올리는 슈거 크래프트는 창의적인 감각을 펼칠 수 있는 예술의 영역이었고, 어릴 적부터 유난히 꼬물거리며 만들기를 좋아하던 내게 그것은 또 다른 세상으로의 연결이었다.
하지만 실행은 잠시 미루고 언젠가는 꼭 배워봐야지, 마음에만 담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치열하게 UX 시나리오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IT업계에서 모바일 UX/UI 기획자로 잔뼈가 굵어가던 김 과장이었는데, 같이 근무하던 과장님이 어느 날 갑자기 제과제빵학원을 등록했다며 같이 다니자고 꼬드겼다. 황소고집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고집쟁이지만, 의외로 습자지 같은 얇은 귀의 소유자인 나는 그날로 과장님과 함께 퇴근 후 제과제빵학원으로 출석하는 이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는 자격증을 따야겠다는 생각보다, 나도 모르게 좋아하게 된 베이킹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머지않아 선택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제과제빵학원은 원리와 이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술자격증을 따기 위한 사람들에게 더 적합한 곳이었다. 철저하게 시험에 나오는 품목들의 실습 위주여서 수업을 하면 할수록 궁금한 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좀 더 본격적으로 베이킹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직장인에게는 피 같은 연차를 원데이 클래스를 듣기 위해 기꺼이 사용하고, 심지어 하루에 두 개의 클래스를 연속으로 들으며 8시간 내내 베이킹만 하는 날도 있었다.
김 과장으로 근무하던 그 시기에는 3개월마다 찾아오는 직장인의 권태기를 버텨내기 위해 3개월마다 제주도로 도망치듯 떠나는 것이 당연한 루틴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제주도로 여행을 가서 베이킹 원데이 클래스를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나의 베이킹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독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해 봄, 베이킹을 넘어 나는 언니가 말했던 슈거 크래프트를 배워보기로 결심했다.
검색의 신이 내린 것 마냥 인터넷을 찾고, 찾고, 또 찾아 두 군데의 업체를 추려냈다. 처음 수강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슈거 플라워였는데, 비슷한 커리큘럼을 틀린 그림 찾기 하듯 비교 분석까지 해서 겨우 결정을 할 수 있었다.
2018년, 그 한 해는 슈거 플라워, 아이싱쿠키, 초코 모델링, 그리고 제과까지 장장 1년 동안 슈거 아트와 베이킹 수업으로 주말을 모두 반납해 가며 쉴틈도 없이 달렸다.
그렇게 나는 어쩌다 만난 베이킹이라는 세계를 경험한 이후에 본업인 모바일 기획을 그만두고, 파티셰로 전향을 하게 되었다. 아직 들려드릴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으니, 베이킹과의 조우에 대한 서사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겠다.
앞으로 풀어놓을 에피소드가 입 안에서 달콤하게 퍼져 입가로 미소가 번지는 크리스마스의 초콜릿 케이크 같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베이킹을 사랑하며 앞으로도 사랑할 나의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는 따스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