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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Jun 21. 2023

나의 소울 디저트, 당근 케이크

EP.01 채소혐오자, 당근으로 계몽하다


나는 채소를 극도로 싫어하는 아이였다.

채소 특유의 그 씁쓰름한 맛과 향이 너무나 싫었다. 때문에 늘 변비를 달고 살았고, 자연스러운 배변 활동조차도 나에게는 공포스러운 경험이 되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데, 그런 유년기를 지나오면서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던 나의 식습관에 변화가 찾아왔다.

20대의 중반 즈음이었을 것이다. 회사에서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는데, 의사 선생님의 입에서 무서운 말이 흘러나왔다.


“이 상태라면 몇 년 안에 죽는 건 당연한 결과예요. 지금 당장 살을 빼세요.”


다이어트야 나에게 늘 평생의 숙제처럼 느껴졌지만, 그렇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이상 ‘언젠가는 해야 하는 숙제’처럼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 선생님의 충격요법 덕분에 나는 하루에 2시간씩 운동을 하고, 세상에서 채소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으로 탈바꿈하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채소를 어느 정도 좋아하게 된 정도였지, ‘아, 당근 너무 좋아!’할 만큼의 당근 러버는 아니었다.


내가 당근을 좋아하게 된 시점이 언제쯤일까 되돌아보니, 아마 제주도를 제 집 드나들듯 하던 30대 초반 즈음이었던 것 같다.

서울보다 세 배 정도 크다는 그 드넓은 제주도 중에서도 나는 유독 동쪽에 위치한 구좌읍을 좋아했다. 바람 많은 제주도에서도 구좌읍은 특히나 바람이 강한 곳이었고, 어느 곳에서든 당근밭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당근이 유명한 지역이었다.

여행 당시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이 한 번 맛 보라며 쥐여준 당근을 한 입 베어 물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알던 당근의 맛이 아니었다. 오독오독 씹을 때마다 터져 나오던 달큼한 맛, 나는 그날 이후 당근에 푹 빠져버렸다.


당근 케이크와의 첫 만남, 소울 디저트와의 조우


제주시의 동쪽에 위치한 구좌읍에서는 어디서나 넓게 펼쳐진 당근밭을 볼 수 있다.


기억이 오래되어 약간의 왜곡은 있겠지만, 당근 케이크와의 첫 만남은 구좌읍의 세화 해수욕장 앞에 있는 ‘미엘 드 세화’에서였던 것 같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요량으로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난 제주도에서 세화 바당을 바라보며 마시던 아메리카노와 당근 케이크, 그리고 그날의 무드 또한 또렷하게 그려진다.

과일이 들어간 케이크는 많이 접해봤지만, 채소가 들어간 케이크라니. 낯설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신선하고도 흥분되는 모험이었다.

게다가 좋아하는 시나몬까지 솔솔 뿌려져 있어 시각과 후각을 동시에 자극하니, 유혹에 약한 어린양은 도저히 견딜 재간이 없지 않은가.

처음으로 이 낯선 조합의 디저트를 한 입 크게 떠먹던 순간, 서울에서부터 이고 왔던 너덜너덜하고 꾸깃꾸깃 구겨진 나의 마음이 마치 다림질을 한 것처럼 반듯하게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를 물으면 나는 0.5초의 망설임도 없이 '당근 케이크'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렇게 당근 케이크는 나의 소울 디저트가 되었다.


몇 년 뒤 엄마와 난생처음으로 단둘이 제주도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엄마에게도 '미엘 드 세화'의 당근 케이크를 소개해 주었다. 당뇨 때문에 단 음식은 거의 먹지 않는 엄마지만, 그 뒤로 내가 만든 당근 케이크는 종종 찾는 것을 보면 엄마 또한 당근 케이크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세화 바당 바로 앞에 위치한 '미엘 드 세화'. 온화한 여인 같은 세화 바당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나에게는 당근 케이크를 먹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

나는 원형의 케이크보다 높은 머핀 틀을 이용해 굽는 방법을 더 선호하는데, 커피와 함께 간단히 먹기에 딱 적당한 양이기 때문이다.

갓 구운 머핀을 꺼내 식힘망 위에서 한 김 식힌 후에 바로 먹으면, 윗면은 바삭하고 안은 폭신해서 두 가지 식감을 같이 즐길 수 있다.

이 식감의 유효 시간은 그날의 습도와 온도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략 6시간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 말인즉슨, 오븐에서 구운 당일의 반나절 정도만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직접 굽는 것이 아니라면 경험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크림치즈로 만든 프로스팅을 슈 깍지를 이용해 머핀 안에 주입해 주면, 바삭함과 촉촉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시나몬 향을 좋아하기 때문에 크림치즈 프로스팅 없이 오븐에서 꺼내 한 김 식힌 당근 머핀을 있는 그대로 먹는 것을 더 좋아한다. 베이커의 가장 큰 특권이자, 베이킹이 가져다주는 힐링에 온전히 젖어드는 순간이 바로 이때이다.


이 특권을 혼자만 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나는 주변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종종 당근 머핀을 만들어주곤 한다.

집에 친구들을 초대하는 날이면 아침부터 분주하다. 직접 양송이 수프를 끓이고, 간단히 즐길 수 있으면서도 색다른 샌드위치나 프리타타 같은 브런치 메뉴들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티타임에 대접할 디저트를 만드는데, 대체로 당근 머핀이 그 주인공이 된다.


재료를 계량하고 반죽을 만드는 일, 게다가 이어지는 설거지까지 누군가는 귀찮아할 과정들의 연속이지만 나는 그 '귀찮은 과정'이 참 좋다. 사소한 프로세스 하나하나에 나의 마음이 담기고, 주룩주룩 아무 형태도 없던 반죽이 소박하지만 근사한 디저트로 변화할 때 내뿜는 그 열기와 향기가 너무나 좋다.

베이킹의 모든 과정이 나에게는 곧 힐링이자, 마음을 나누는 통로가 되어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가닿는 것을 알기에 어느 하나 대충 할 수가 없다.


나의 최애 디저트, 당근 머핀의 다양한 얼굴들. 이제는 눈을 감고도 만들 수 있을 만큼 나의 시그니처 디저트가 되었다.


올해 2월, 나는 우연하지만 우연하지 않은 기회로 예술 심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ART.P 예술심리연구소라는 기관에서 통합예술심리 전문가 과정을 통해 먼저 워밍업을 하고, 이후 개설된 심리 바리스타 과정으로 커피와 다양한 음료를 접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매시간 다양한 매개체를 이용해 나의 심리 상태를 점검하고, 진짜 나와 마주하게 되었다. 덕분에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의 본질에 대해 늘 고민하던 그 지점이 조금은 분명해졌다고 생각한다.


취미 부자인 나는 시작은 원대하지만 끝이 미약한 것이 약점이라면 약점인데, 가장 잘하고 싶고 오래도록 하고 싶은 것이 베이킹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흰머리가 성성한 할머니가 되어서도 오븐 앞에서 디저트를 구우며 행복해하고 있을 나의 모습이 그려진다.

인생의 크나큰 위기가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쳐 왔을 때도 베이킹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이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게 나는 베이킹을 통해 기꺼이 그 위기라는 파도를 즐겨왔다고 자부한다.

내가 이뤄나갈 행복의 키포인트, 이 달콤한 행복을 모두가 누릴 수 있도록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앞으로도 더욱 베이킹을 사랑할 것이다.




CAKE RECIPE

시나몬 향기가 솔솔 나는 당근 머핀 만들기



당근 머핀의 좀 더 상세한 레시피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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