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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Jul 11. 2023

여름의 노오븐 디저트, 판나코타

EP.02 서른아홉 번째 여름에게 바치는 연서


"여름이었다."

말로 다 설명하기가 힘든 수많은 감정들을 어쩜 이렇게 한 문장으로 간단히 압축할 수 있었을까. 이 문장을 만든 이는 분명 천재일 것이라고 늘 생각했다.


나에게 여름은 그다지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계절이 아니었다. 습기와 열기가 한데 엉겨 붙어 끈적하게 응축된 공기, 다양한 사람들이 풍기는 체취가 곧 악취로 변하는 지옥철, 내내 우울한 낯빛으로 눈물을 쏟아내는 회색 하늘까지. 눈물만 쏟으면 다행이게, 엉엉 울다 못해 번쩍번쩍 울화까지 토해내는 날에는 여름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런 여름에게도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그만의 무드가 분명 있기 때문에 아주 조금, 여름에게 마음 한편을 내어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후끈하게 덥혀졌던 하루가 저물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한강 둔치에서 마시는 맥주라던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하얀 솜사탕 같은 구름들, 초록을 뽐내며 반짝이는 나뭇잎 같은 것에서 나는 소소한 여름만의 즐거움을 찾았다.

어떤 날에는 장마철의 빗소리가 스타카토처럼 들린다며 오글거리는 20대의 감성을 다이어리 한 면에 끄적인 적도 있었다. 그때의 두 배나 나이를 먹었는데도 여전히 빗소리가 스타카토처럼 들리는 내가 나도 조금 싫을 때가 있다.


내 여름의 소소한 즐거움들. 빗방울과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있으면 무더위도 두렵지 않다.


나는 어쩌다가 여름을 사랑하게 되었나


싫다가도 좋은 애증의 여름에게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 깊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코로나가 한참 기승을 부리던 2020년 6월, 나는 3년간 거주하던 사당동에서 경기도 안산으로 갑작스레 이사를 가게 되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단 한 번도 서울을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던 나였다. 그런 내가 경기도민이 된다니, 얼떨떨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우선 출근 거리가 20분에서 1시간 40분으로 늘어나는 것부터가 큰 고비였다. 베이커에게 출근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해도 채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수시로 잠이 쏟아지는 초기 임산부에게는 그야말로 고문이 따로 없었다.

- 이 이야기는 언젠가 자세히 써 볼 생각이다. 참고로 나는 임신부터 출산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 겪어낸 씩씩한 엄마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세상 친절하던 분들의 배려 덕분에 그 먼 거리를 서서 이동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새로 이사한 집은 동향의 아주 오래된 아파트였다. 9층에 위치한 그 집은 앞이 탁 트인 논밭뷰의 베란다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첫눈에 그 뷰에 반해 덜컥 계약을 하고 말았다.

새벽 5시, 서로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눈을 겨우겨우 뜨고 출근 준비를 한다. 어스름한 공기를 가르며 밝아오는 아침해를 바라보다가 아차, 싶어 서둘러 출근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시원하게 장맛비가 쏟아지던 날에는 우렁찬 오케스트라 같은 빗소리를 감상하다가, 비가 그치고 나서 하늘에 크게 걸린 무지개를 보았다. 그 무지개는 어린 시절 애니메이션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고이 접어 마음속 한 구석에 밀어둔 동심을 다시금 피어오르게 했다.

나는 하늘이 푸르고 구름이 높은 날이면 저녁을 기다리곤 했다. 그런 날은 핑크색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9층의 베란다에서 바라보던 풍경들. 집에서 이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메리트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1년 남짓 살았던 그 동네에 나는 애정이 전혀 없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가지 않아 언젠가는 떠날 생각을 늘 품고 시간들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집에 대한 애정만큼은 대단했던 것 같다. 논밭뷰를 바라보며 베이킹을 하던 날들과, 여름의 푸르른 풍경들, 품에 안긴 작은 사람과 함께 새벽노을을 바라보며 새소리를 감상하던 날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서른일곱 번의 여름을 보내고 나서야 나는 그 계절의 아름다움을 깨닫고는 지나간 여름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지금에서라도 깨닫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여름의 노오븐 디저트


물론 여전히 더위에는 취약한 편이라, 요즘같이 더운 날에는 오븐 앞에 서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그럴 때에는 굳이 오븐을 켜지 않아도 되는 ‘노오븐 디저트’를 만든다.

노오븐 디저트라 하면 보통 젤라틴을 이용해 냉장 혹은 냉동에서 굳히는 레시피들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익힌 크림’이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안식 푸딩, 판나코타이다.

생크림, 우유, 설탕을 넣어 데우고, 물에 불린 젤라틴을 넣어 용기에 굳히기만 하면 완성되는 초간단 디저트.

심지어 위에 올리는 과일 퓌레(재료를 갈아 체에 거른 것)에 따라 취향껏 다양한 맛으로 즐길 수 있으니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


생과일을 갈아 만든 퓌레를 올린 판나코타는 손님 맞이 디저트로도 손색이 없는 비주얼을 자랑한다.


전문적인 재료와 도구가 많이 필요한 다른 디저트들과 달리, 바닐라빈을 제외하고는 전부 구하기 쉬운 재료들이라 베이킹에 문외한이어도 멋지게 완성할 수 있다. 베이킹에 있어서 또 하나의 난제로 여겨지는 설거지 또한 간단히 해결되니 이 얼마나 훌륭한 디저트인가.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 여름이라는 반짝이는 계절에, 판나코타를 꼭! 만들어 보라고. 그리고 그 무드에 한껏 취해 여름만의 행복에 푹 빠져 보라고.


한 달간의 짧은 만남, 신비복숭아


여름은 과일의 계절이다. 매대에는 온갖 과일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고, 무엇을 먹어볼까 바쁘게 시선을 옮기는 사이 미각은 이미 맛을 음미하고 있다.

나는 과일 중에서도 복숭아를 가장 좋아한다. 복숭아도 수많은 품종이 있는데, 그중 신비복숭아는 6월 딱 한 달간만 맛볼 수 있어서 더 귀하게 여겨진다. 겉은 천도복숭아같이 딱딱하게 생겼지만, 속은 말랑한 백도처럼 부드러운 반전 매력도 가지고 있다.

1인 가구였던 시절에도 6월이면 신비복숭아를 박스로 사서 끼고 먹었을 정도로 나는 유독 이 복숭아를 좋아한다.



얼마 전 가장 아끼는 동생이 찾아왔을 때, 신비복숭아로 판나코타를 만들었다.

전날 미리 만들어두어 바닐라 향이 진하게 밴 판나코타 베이스에, 신비복숭아와 레몬즙, 알룰로스를 살짝 넣어 새콤달콤한 퓌레를 만들어 올려주었다.

판나코타를 한 스푼 떠 입에 예쁘게 담고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음미하던 그 동생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스물넷, 인생의 수많은 갈림길 앞에서 혼돈을 겪고 있는 동생의 시간들에, 같은 길을 걸었던 내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던 디저트였다.

그런데, 그 동생은 나에게 그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말로 보답을 해주었다.


“언니, 너무 충만하게 채워진 느낌이에요!”


나는 동생의 말에 감동을 받아 정말 다행이라고 답했다.

디저트는 늘 이렇듯 따로 떨어진 두 개의 마음을 하나로 연결해 준다. 그 마음들은 나란히 손을 마주 잡고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내가 늘 베이킹하길 잘했다고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방황하는 20대의 청춘에게도, 여전히 혼돈의 연속인 40대의 중년에게도, 한 입의 디저트는 모두에게 공평한 위로를 준다. 그러니 여러분도 마음의 위안이 필요하다면 주저 말고 이 멋진 디저트를 즐겨보시길 바란다.

아마, 여러분도 어느덧 여름의 판나코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여름날, 손에 쥔 무지개. 여러분의 행복도 이렇게 손에 쏙 잡히기를.




NO OVEN RECIPE

새콤달콤 탱글탱글한 이탈리안식 푸딩, 복숭아 판나코타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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