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3 오늘도 수고한, 내일도 수고할 당신에게
IT업계에서의 첫 아르바이트는 Daum이었고, 연이어 Naver 서비스를 운영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나의 진로는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Naver에서 다시 Daum으로, 그리고 운영 말고 기획을 하겠다며 이직을 했다. 그렇게 돌고 돈 세월이 무려 11년,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뛰어넘는 시간이었다.
김 과장님으로 불리는 게 익숙해질 무렵, 하루를 잘 보내기보다 하루를 잘 견디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던 날들이 점점 늘어났다.
비로소 인생의 다음 단계를 준비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한 나는, 베이킹 수업에 수입의 상당 비율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용한 수업료를 전부 합치면 유명한 제과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정도였다.
내 이중생활은 주말도 없이 베이킹과 슈거 아트 수업에 매진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UX 시나리오, 또는 화면 설계서라고도 부르는 기획서를 개발팀에 넘기고 나면 짬을 내어 틈틈이 나의 브랜드 기획서를 만들었다. 신규 구축보다 운영의 비율이 높은 프로젝트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QA테스트라는 소란스러운 환경에서도 브랜드 기획서의 명목 아래 마음껏 나의 상상을 펼치는 일, 그것은 놀라운 평온의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브랜드명을 정하기 전 콘셉트로 고민을 하고 있던 그때, 띵동- 업무 메일 알람이 떴다.
능숙하게 답변 메일을 보내고 나자 갑자기 머릿속 전구가 반짝, 하고 빛났다.
Re: Alice
Reply from Alice. 앨리스가 보내온 회신.
삶이 팍팍하고 녹록지 않을 때, 달콤한 디저트 한 입에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는 동화를 떠올릴 수 있기를, 그리고 그런 동화 같은 예쁜 디저트를 만들겠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이 되면 멋지게 퇴사를 하고 디저트샵을 차려야지!라는 얼토당토않은 꿈도 함께였다.
기회는 위기가 된다
모든 일은 아빠의 자랑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가족 모임에 불려 가 친척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아빠는 작은 아빠 -엄밀히 말하면 아빠의 사촌동생이니 나에게는 종숙어른이지만- 에게 내가 그동안 작업했던 슈거 플라워와 아이싱쿠키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기에 바빴다. 그 사진들을 보고 작은 아빠는 나에게 갑자기 투자를 하겠다고 선언했고, 어느새 동업자로 선포하며 김사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게 흘러가서 어리둥절했지만, 가능하다면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불혹이 되면 실행하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해가 바뀐 서른일곱에 'Re: Alice'라는 이름으로 현실이 되었다.
총 5천만 원이 투자된 나의 첫 디저트샵. 원래 액세서리 쇼룸으로 운영되던 공간은 나의 꿈을 펼치기에 너무나 적합한 곳이었고, 여러 매물을 아무리 둘러봐도 복층의 구조를 가진 그곳이 눈앞에 아른거려 더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2층에는 테라스가 있고, 앞으로는 플라타너스 나무와 살구나무가 있어 멀리서 봐도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계약을 하고 오픈을 준비하면서 나는 더없는 행복을 느꼈다. 언제가 될지 모르던 아득한 꿈이 정말 현실이 되다니, 나는 그것이 내게 내려진 축복이라 여겼다. 고난의 시작인 줄도 모르고.
오픈을 앞두고 베이킹 수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또한 필요한 기물 목록을 정하고, 인테리어 레퍼런스를 샅샅이 뒤져 콘셉트에 따라 요구 사항을 정리했다. 전등 스위치, 주방 수전, 하다못해 도어록 하나까지도 디자인을 정해 전달할 정도로 나는 예민하고 깐깐하게 굴었다.
추후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인테리어를 담당했던 아빠의 친구는 혀를 내두르며 '보통내기가 아니야'라고 했다고 한다. 그만큼 나는 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공간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모든 것에 완벽을 기하는 성격 탓에 스스로도 피곤해했지만, '넥스트 레벨'의 시작이 아닌가. 그 정도는 이해받아 마땅하다며 합리화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테리어 일정은 하루 이틀 자꾸 밀리면서 준비 기간이 길어져 예상했던 것보다 두 달이나 오픈이 연기되었다.
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즈음, 그렇게 매일 밤 잠을 설쳐가며 준비하던 공간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그리고 첫날부터 모든 것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작은 아빠라고 부르던 그 자는, 투자자라는 명분으로 마치 자신이 대표인 양 행동하기 시작했다.
사업자등록증은 내 명의였고 오픈에 필요한 모든 준비도 다 내가 했지만, 유일하게 나에게 없던 그 돈을 빌미로 말이다. 무전유죄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Re: Alice의 로고가 박힌 대표 명함을 요구하고, 자신의 지인들을 불러 모아 나를 마치 직원 부리듯 대했다. 오픈 이벤트로 고객님들에게 나눠주려고 밤새 준비한 아이싱쿠키는 어느새 그의 지인들 손에 들려있었다.
그 이후에도 온갖 간섭과 갑질이 뒤따랐다. 지인에게 보낼 케이크를 만들라며, 대형 제과점을 운운하는 것부터 나와 의견이 맞지 않았다. 베이킹 클래스 중에는 술에 취한 채로 수시로 전화를 해서 수업 시간을 줄이라고 강요했다.
이 모든 상황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부동산 사장님과 건물주는 '되도록이면 저 사람과 엮이지 말라'며 나에게 슬쩍 충고를 했다.
나의 완벽은 완벽하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투자 조건이 분명히 명시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부터가 나의 실수였다.
그 자의 진짜 계획은, 5천만 원을 투자하고 내 노동력으로 매장을 운영하여 매달 250만 원의 수익을 받는 것이었다. 법정 최고 이자를 넘어서는 그 금액을 위해 내 꿈을 탐하며 이용한 것이 나는 몹시 불쾌했다. 그간의 경력을 뒤로하고 꿈을 위해 노력한 내 시간들을 부정당한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화가 났던 것은 '내 돈으로 네 노동력을 사는 것이 도대체 왜 문제냐.'라는 어처구니없는 태도였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는 눈곱 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오만함이었다.
정당한 조건을 요구했다면 나는 그 이상도 했을 것이다. 가족이니까, 그리고 내 꿈을 인정해 준 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나는 그 어떤 것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의 언행은 심히 선을 넘었다.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할 테니, 간판만은 내려달라고 이야기했다. Re: Alice라는 이름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꿈꿨던 시간들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돈 얼마에 그것을 팔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 스스로 만든 나만의 동화 속 세상을 내 손으로 처참하게 부수고 싶지 않은 간절함이었을 것이다.
그 자는 나에게 계속 꿈을 이어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투자한 원금은 다시 돌려달라고 했다. 그 자는 부모님까지 엮어 가능한 대출을 받고, 내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고 자신의 처에게 거짓말을 하며 나에게 차용증까지 받아 갔다. 그렇게 나는 꿈을 이룬 김사장에서 갑자기 빚더미에 오른 실패자로 전락했다. 인생의 큰 깨달음을 이때 얻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구나. 그래, 처음부터 모든 것이 허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삼가겠다. 복잡한 사정들이 얽히고 얽혀 풀기 힘든 실타래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누군가는 바보라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바보 같았으니까. 그래도 큰 공부를 했다고 여기기로 했다. 덕분에 내가 얼마나 고난에 강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이득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위기는 곧 기회가 된다
나는 한 달이 그렇게 짧은 시간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월세와 각종 세금을 내는 날은 어찌도 그리 빨리 돌아오는지, 그날이 다가올 때면 눈을 뜨는 것이 무서워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하루를 버티는데 온 힘을 다했다. 온갖 기획서와 회의록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과거의 김 과장과 꿈을 짓밟히고 빚더미에 앉은 김사장은, 그저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음에 안도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었다.
핸드폰의 작은 진동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날들이었다. 미납금 독촉과 곧 신용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정중한 협박 문자는 어느새 나에게 공포증으로 다가왔다.
혼자서는 도무지 헤쳐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빛 하나 없는 깜깜한 터널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답이 없는 상황에서의 유일한 탈출구로 결국 나는 회생법원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체납, 신용불량 같은 단어는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역시 인생은 알 수가 없는 법이었다.
개인회생을 진행하는 데도 돈이 필요했다. 어느 하나, 돈이 아닌 것이 없었다. 주변의 도움과 전재산을 탈탈 털어 수임료를 준비했다. 숨 쉴 구멍이라도 만들려면 수임료는 문제도 아니었다.
담당 사무장님은 나의 사연을 듣고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셨다. 상담 내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진한 분노의 한숨을 내뱉기도 하셨다. 그리고, 법원에서 결정한 금액을 3년간 분납하기 위해서는 취업이 필요할 것이라고 하셨다.
가장 쉬운 방법은 기획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겠노라며 11년의 경력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둔 나의 자존심이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바닥까지 내려갔음에도, 그놈의 알량한 자존심은 꺾이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나는 베이커리의 취업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짧은 디저트샵 운영 경력은 업계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베이커리에 취업하기에는 나이도 많아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운이 좋게도 나는 쌀전문 베이커리에 신입 베이커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출근 시간 오전 7시. 그 시간에 잠드는 것이 일상이었던 내가, 부지런을 떨며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출근을 했다. 제과제빵학원에서 수업 시간에 만든 것 말고는 빵 경험도 전무했던 내가, 각종 빵을 능숙하게 생산하기까지는 3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레시피를 익히고, 데크오븐의 온도 세팅과 굽는 시간을 외우는 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작은 메모지에 모든 품목의 생산 과정을 전부 적어 종이가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들고 다니며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나를 포함해 생산 담당 셰프 두 명이 전부인 아주 작은 소규모 매장이라 빵을 만들다가 손님 응대까지 해야 해서, 그야말로 근무 시간에는 전쟁통이 따로 없었다.
오후 3시, 퇴근시간이 되면 나는 작업실로 다시 출근을 했다. 주문받은 케이크와 디저트를 만들고, 밤이 깊어서야 두 번째 퇴근을 했다. 잠을 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오로지 베이킹하는데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되돌아봐도 그때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느 날에는 지친 몸을 침대에 뉘우고 텅 빈 천장을 마주하고 있다가 커튼 사이로 슬쩍 스미는 빛을 보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도 언젠가 빛을 볼 날이 있을까?
그렇게 묻는 나에게, 나는 스스로 대답했다.
지금도 빛을 보고 있잖아. 가장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그 일을 잠자는 시간 빼고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이니. 지금은 아주 작은 빛줄기일 뿐이지만, 언젠가는 큰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날이 올 거야. 정말 그럴 거야.
자문자답을 하고는 내가 나에게 해주는 위안에 안심하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며
상황이 어려워지며 작업실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1년 넘게 계약을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종종 매물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건물주는 어지간한 업종은 다 거절 의사를 밝혔다. 건물에 대한 이미지가 있으니, '그럴듯한' 업종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혼자 월세를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워서, 2층은 플라워샵 오픈을 원하는 지인과 전대 계약을 맺고 1층만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지인의 소개로 기적처럼 계약이 성사되었다.
전대 계약도 끼고 있어 꽤나 복잡했지만, 그 많은 서류들이 작업실을 정리하던 날의 심정만큼 복잡할까 싶었다. 다른 베이커리에서 월급을 받아 월세를 내면서도 지켜왔던 작업실이었다. 이제는 드디어 놓아줄 수 있다는 후련함과 동시에, 넘치는 애정으로 공간을 가꾸던 나의 첫 디저트샵을 결국은 보내줘야 한다는 아쉬움이 한데 섞였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감정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분명했다. 마침 코로나가 끝도 없이 확산되고 있던 시기여서 자영업자들은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대단한 용기로 계약을 이뤄낸 그 사장님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정말이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작업실을 정리하면서 내가 사용할 것을 제외하고는 상당수의 베이킹 도구들을 같이 일하던 셰프님에게 드렸다. 업소용 냉장냉동고와 쇼케이스, 커피 머신 등의 처분을 위해 중고 매입 업자에게 연락을 했다. 그 기물들을 전부 사는데 들었던 돈의 1/6이 내가 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마지막이 실감되었다. 아마도 그날, 많이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과 허무함, 그 사이 어디쯤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위기를 겪으면서, 나는 빛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인생에 있어 가장 어두운 시기가 와도, 그것이 온전한 어둠이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나는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에 매우 감사했다. 어찌 되었든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음에, 나는 아픔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마치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녘 같은 나날들이었다.
시간이 흘러 현재에 와있는 나는, 지난 시간 속의 나에게 참 많이 수고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긴 어둠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오느라 고생했다고 꼭 안아주고 싶다. 힘을 꼭 주고, 이겨내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던 나를 가장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주고 싶다. 비록 첫 시작은 그렇게 막을 내렸지만, 그럼에도 떠오르는 태양처럼 더 찬란히 빛날 내일이 있어 다행이라고,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
상큼한 비타민처럼 힘이 나게 해 줄 디저트
나는 힘을 내고 싶을 때 상큼한 것을 먹는다. 오렌지, 레몬, 자몽 등의 시트러스 향을 가진 과일부터, 비타민 음료까지. 그런 것들을 먹고 나면 바닥까지 떨어진 마음이 어느덧 노란 병아리처럼 삐약 삐약 거리며 생명력 있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그런 날에는 레몬케이크를 만든다. 마들렌 계열의 반죽에 레몬즙, 레몬 제스트, 레몬 캔디필 같은 재료를 잔뜩 넣어 맛과 향을 한껏 끌어올려준다.
반죽을 촉촉하게 만들기 위한 재료로 '레몬 톡톡 베이스'라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레몬 음료를 만들 때 사용하는 재료인데, 상큼한 향을 더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버터의 비중이 높아 묵직해질 수 있는 맛을 좀 더 산뜻하게 만들어준다. 물론 없어도 상관은 없지만, 베이킹에 있어서 재료의 유무로 한 끝 차이가 결정되므로 되도록이면 꼭 넣기를 추천한다.
버터는 무염버터라면 어떤 것이든 좋지만, 나는 버터가 많이 들어가는 구움 과자류에는 프랑스산 고메 버터를 사용한다. 사실 어지간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차이를 발견해 내기가 힘들지만, 오븐에서 나왔을 때의 풍미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180도의 오븐에 13분, 굽는 시간도 길지 않아 잠깐이면 힘이 불끈 날 디저트를 오븐에게서 얻어낼 수 있다.
다만 반죽의 숙성 시간은 필요하다. 무엇이든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 냉장고에서 숙성되는 동안, 반죽은 레몬의 상큼한 향기를 더욱 머금고, 반죽을 하며 잔뜩 낀 크고 작은 기공들을 안정감 있게 잡아준다.
우리 인생도 깊이를 얻기 위해 숙성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온갖 거품들을 다 걷어내고 나면, 그제야 온전하고 단단한 내면을 얻게 되는 것이 참으로 닮아있다. 베이킹을 하면서도 인생의 이치들을 배워갈 수 있어, 나는 이 시간이 감사하다.
지난한 어둠의 시간을 거치고 있을 당신에게,
오늘도 수고한, 내일도 계속 수고할 당신에게,
그리고 또 그런 나에게, 이 디저트를 선물하고 싶다. 가뿐하게 훌훌 털고, 다시 힘차게 앞으로 나갈 우리들을 위하여.
CAKE RECI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