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감정의 책임 전가에 대하여
나이의 앞자리가 1에서 2로 바뀌는 것, 부모님에게서 독립하는 것, 경제적 자립을 이루는 것 등.
홀로서기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나는 진정한 홀로서기란 혼자여도 괜찮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다. 아니, 그런 사람이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주인만을 바라보는 강아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맞겠다.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에게 의지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남자친구에게 많은 의지를 했다. 그것이 지나쳐서였을까, 친구 관계에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연인 관계에 있어서는 늘 을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를 맺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가까워지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이 관계도 끝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불안했다.
그런 불안감이 떠오를 때면, 조금의 소홀함에도 서운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나는 그토록 마음이 연약한 인간이었다.
오래된 나의 X 이야기
아주 오래전에 만나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는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 줬다. 1시간이 넘는 거리에도, 뜬금없이 보고 싶어 졌다며 집 앞으로 달려와주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내가 심히 토라졌을 때, 그는 내가 좋아할 만한 작은 초록이 화분을 사들고 찾아왔다. 하지만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그날 잘못한 것은 바로 나였다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네가 너무 심했다며 나를 타박했다.
그럼에도 나는 못내 서운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를 몰아세웠다. 그때의 나는 정말 나쁜 년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의 작은 선물에도 나는 뜻을 오해하여 자주 토라지고는 했다. 아직도 그가 사줬던 커플티가 기억난다. 앞에 커다란 텍스트가 쓰인 흰색 후드티였다.
나는 그때도 제법 통통한 편이었는데, 그가 사준 후드티는 스몰 사이즈였다.
‘어때? 마음에 들어?’하고 나의 반응을 기대하며 해맑게 웃는 그를 향해 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거 나보고 살 빼라는 의미야?’하고. 하… 그날의 일을 되돌아보면서 그에게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나 같아도 정나미가 떨어질 것 같은데, 그는 한없는 애정으로 나를 감싸주었다.
그는 잘생기고 키도 큰,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심성 하나만큼은 어느 곳에 내놔도 뒤처지지 않았다.
다소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면이 있었지만 그의 둥근 얼굴만큼이나 성격도 둥글둥글해서,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잘 지냈다.
한 번은 그가 장을 잔뜩 봐서 양손 가득 들고 우리 집에 왔다. 요리가 취미인 그였는데, 집에서 무수분 수육을 만들어보고 맛이 너무 좋아서 우리 부모님께 만들어드리고 싶었단다. 신이 나서 엉덩이를 씰룩여가며, 우리 집 주방에서 재료를 손질하던 그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날 우리 가족은 배가 찢어지게 그가 요리해 준 수육을 먹었다.
그와의 첫 만남
우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일본에서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귀국한 뒤 하게 된 첫 아르바이트였다. Daum에서 나는 유아동과 식품 카테고리, 그리고 그는 여성 카테고리의 보조 MD였다. 근무하던 층수도 달랐는데, 그는 별 이유가 없음에도 수시로 우리 층을 들락날락거렸다.
내 바로 옆자리의 아르바이트생과 그는 실제 오래된 친구였기 때문에 대단한 우정이네,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 사이에 우리가 가까워진 계기가 있었다.
당시 나는 지독한 스토킹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저 밥 한 번 같이 먹었다는 이유로 만나자는 연락을 수차례, 부재중 통화를 정확히 168회 남기는 사람이 있었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거짓말에도 그 사람은 아닌 것 다 안다며 끈질기게 만남을 요구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뻔뻔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그에게 남자친구인 ‘척’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을 훔치는 대신, 그에게 언제 밥 한번 사겠다며 기약 없는 약속을 던졌다.
그런 나에게 그는 그날이 정확히 ‘언제’인지 물었다. 그날은 그다지 멀지 않았고, 우리는 회사 근처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마주 보고 앉아 환하게 웃었다.
고백에 대한 몹쓸 답변
그는 얼굴부터 몸매까지 동글동글해서 꽤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반곱슬이었던 그는, 뒷머리카락이 늘 동그랗게 말려있어서 그 점도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가 부지불식간에 기습적인 고백을 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훅 들어온 그의 말에, 나는 정말이지 몹쓸 대답을 하고 말았다.
‘10kg만 빼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자.’
아무리 철 모르던 과거의 나 라지만, 정말 대책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다시 한번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그는 오히려 방긋 웃으며 그러겠다고 했다.
그날부터 그는 매일 운동장을 10바퀴씩 돌며 의지를 불태웠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나 싶어 나는 먼저 한 말을 취소하고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남자친구인 척을 하던 그는 진짜 나의 남자친구가 되었다.
우리 아빠는 그런 그를 참 마음에 들어 했다. 그와는 3년간 연애를 이어갔는데, 가족들도 으레 그와 내가 부부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헤어지는 중입니다
그는 어느덧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취업에 전념했다. 나 또한 네이버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옮겼다가, 그것이 경력이 되어 네이버의 자회사에 취업을 하였다.
우리는 같은 IT업계 종사자라며 서로를 격려했다. 개발자로 성장한 그는 늘 발전에 대해 목숨을 거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의 나는 그의 진취적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데이트를 하면서도 함께 공부하기를 원하는 그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나 또한 자신처럼 발전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 강요가 되었다.
각자의 사회생활로 분주하던 어느 날, 나는 회사 동료와의 약속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회사 동료는 남자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30분에 한 번씩 전화를 했다.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냥 뭐 하고 있냐, 집에는 언제 들어가냐 같은 사소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는 저녁식사 동안 5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다.
그 이후에도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집착에 가까운 그의 행동에 나는 너무나 화가 났다.
그와 연애를 하면서, 나는 종종 그와의 미래를 꿈꿨다. 결혼을 이야기하는 나에게 그는 한결같이 ‘3년 후에’라고 대답했다.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늘 우리의 결혼은 3년 후의 약속이었다.
서서히 마음이 지쳐갈 때쯤, 나에게는 우울증이 찾아왔다. 내 나이 스물여섯, 어리고도 예쁜 나이에 마음의 병을 얻어 나는 잿빛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당시 나의 여동생은 스물넷의 나이에 상견례까지 마치고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내심 동생의 결혼에 내가 상처를 받을까 신경을 쓰시는 눈치였다.
오히려 나는 요지부동 ‘결혼은 3년 후’만 반복하는 앵무새 같은 그에게서 상처를 받고 있었다.
안 그래도 반짝이는 미모를 가진 동생은 결혼을 앞두고 더더욱 아름다워졌다.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와의 미래를 그려보려 노력하였다. 그래도 한 때는 선명하게 그려지던 우리의 미래가 이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여동생의 결혼식 바로 전날 밤, 나는 늘 그에게 그러했듯 무례하게도 전화로 이별을 고했다.
우리에게 청사진이 없다는 이유였다. 핸드폰 너머의 그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이별한 지 5분 만에 다시 걸려온 그의 전화에, 나는 끝내 못되게 안녕을 말했다.
다음날,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했더니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친척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너는 언제 결혼하니, 시집가서 얼른 아이도 낳아야지, 로 이어지는 흔하디 흔한 패턴이었다.
나는 입을 귀에 걸고서는, 한껏 밝은 모습으로 ‘저 어제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라고 이야기했다.
그 누구도 다음의 말은 잇지 못했다. 나는 세계 최강의 공격수가 된 것 같아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바보처럼, 가슴에는 피멍이 물들고 있는지도 모르고.
연애 3년, 그리고 잊는데 3년
헤어진 후에 그는 생각보다 자주 나의 꿈으로 찾아왔다.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그런 꿈을 꾸고 난 다음날이면, 이상하게도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처럼 공허해졌다. 그럼에도 눈물은 나지 않아서, 그저 그 마음을 혼자 삭이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의 연애를 더 했지만 길어봤자 1년 반을 넘기지 못하고 또다시 이별의 반복이었다.
나는 저주가 내린 것이 분명하다며 애꿎은 그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와의 관계에서는 그렇게 갑의 위치에 서고 싶어 했으면서, 이후의 상대들에게는 알아서 을의 위치로 가기를 자처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남자친구와 알콩달콩 마음을 키워가도, 그는 헤어진 이후로 3년 동안 잊을만하면 꿈에 나타났다.
가엾게도, 나는 진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아니, 사랑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표현에 서툴러 매번 번지수를 잘못 찾은 방랑객처럼, 엉뚱한 말과 행동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된 적이 있다.
퇴근 후 동네 지하철역에서 두 번, 그리고 회사 근처에서 한 번 우연히 그를 마주쳤다. 회사까지의 거리가 1시간 30분이나 걸리기 때문에 필연일 리는 없었다.
그렇게 자꾸 마주치던 어느 날, 그는 나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했다. 애써 태연한 척, 나도 인사를 하고 돌아섰는데 며칠 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예전 번호를 기억하고 혹시나 해서 연락을 해봤다고 했다.
그와 동네의 호프집에서 만나 맥주를 마시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그는 나와 헤어진 뒤의 풀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이별 직후 일에 미쳐 1년을 살다가, 바로 옆동네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그리고 새로운 연인을 만나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덧붙여 예비신부의 이름이 나와 같다고도 했다. 이별 후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음에도, 나는 그날 끝끝내 미안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지나간 시간이라 치부하면서.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그에게서 연락이 왔지만, 나는 결국 그의 연락처를 차단했다.
몇 년이 지나 김 과장이던 시절,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연구소 선임님이 QA테스트를 부탁하며 테스트폰을 가져다줬는데, 계정 정보에서 그의 ID를 발견한 것이었다. 너무 놀라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 또한 혹시나 해서 사내 인트라넷을 뒤져봤지만 그를 찾지는 못했다.
그 테스트폰이 어디서부터 전해져 온 것인지도 알아내지 못한 채 우리의 끈질긴 인연은 그제야 끝이 났다.
혼자여도 괜찮아
미숙한 나의 사랑에 대한 책임을 구태여 그에게 돌린다 한들, 바뀌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저 추억 한 편에 흘려보내듯, 하지만 최대한의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이 글을 쓴다.
나이를 먹고 서야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내가 얼마나 그에게서 큰 사랑을 받았는지 알게 되었다. 무지했던 나는 감사함을 모르고 그에게 한없이 사랑을 요구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꺼이 아낌없는 나무처럼 늘 사랑을 쏟아부어주었다. 이별이 가까워 옴을 직감했던 날들과, 기어이 오고야 만 이별 앞에서까지도.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이 글을 볼리는 만무하겠지만, 이렇게나마 잊힌 시간들 속의 그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 꿈에 그가 나타나는 일은 없다. 그리고 그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파 우는 일 또한 없다.
지금은 혼자여도 외로운 감정을 느끼지 않을 만큼, 나는 많이 회복되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 주는 작은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꼬마 영웅 덕분에 진짜 사랑을 깨달은 나는, 이제 그에게 이렇게 사과의 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우연히라도 또다시 그를 만나게 된다면, 나로 인해 힘들었을 시간들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티라미수를 꼭 만들어주고 싶다.
영문도 모르고 이 글의 주인공이 된 그가, 끝까지 이기적인 나의 사과를 받아줬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기분을 한껏 끌어올려줄 티라미수
티라미수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전통 디저트다.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익숙한 디저트라 어디서든 흔하게 만나볼 수 있다.
‘나를 들어 올리다 ‘라는 뜻을 가진 티라미수는, 기분이 좋아지게 하다, 혹은 기운 나게 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커피와 함께 이 디저트를 먹으면, 금세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은 일종의 플라세보 효과를 느낄 수 있다.
원래 티라미수는 가정에서 그릇에 만들어 간단히 먹는 홈메이드 디저트이기 때문에 젤라틴이 들어가지 않지만, 케이크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형태 유지를 위해 젤라틴을 넣는 것이 필수이다.
기본의 기본이 되는 티라미수의 필수 재료로는 마스카포네 치즈, 사보이아르디, 슈거파우더, 달걀노른자, 그리고 커피가 있다.
마스카포네 치즈 대신 크림치즈를 써도 괜찮지만, 나는 역시 마스카포네 치즈 쪽을 좀 더 선호한다. 취향의 차이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재료로 만들면 된다.
사보이아르디는 사보이아 지역의 전통 과자인데, 영어로는 레이디핑거라고도 부른다. 흰자로 머랭을 올려 가루 재료와 섞어 굽기 때문에, 폭신폭신한 식감이 재미있다.
달걀의 살모넬라균이 걱정된다면, 사바용*을 만들어 크림에 섞는 방법도 있다. 베이킹의 세계란 이처럼 무궁무진하다.
*사바용 : Savayon. 달걀노른자와 설탕, 화이트 와인을 중탕하여 휘핑한 크림.
커피의 경우 에스프레소 또는 아메리카노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커피의 풍미를 더 진하게 만들기 위해 깔루아를 추가하기도 하고, 설탕을 넣어 커피시럽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각 가정마다 전해 내려오는 레시피가 있어서 만드는 법이 천차만별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레시피만 하더라도 네 가지 이상이 되는데, 베이킹을 좋아하더라도 손이 많이 가는 번거로운 레시피는 잘 사용하지 않게 된다.
티라미수를 만드는 과정은 간단하다. 마스카포네 치즈에 달걀노른자를 섞어 만든 크림을 한 층 깔고, 사보이아르디를 커피에 적셔 올린 뒤 다시 크림을 올려준다. 이것을 원하는 만큼 반복하여 쌓아 주고, 마지막으로 코코아 파우더를 솔솔 뿌려 주면 눈이 번쩍! 하고 떠지는 티라미수가 완성된다.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보관했다가, 스푼으로 푹 떠서 먹으면 주렁주렁 포도알처럼 달라붙어 있던 걱정들이 모두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불편한 감정들까지 쏙쏙 찾아 제거해 주는, 똑똑한 해결사를 얻은 것 같은 든든함마저 생긴다.
스트레스를 먹을 것으로 푸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때때로 나는 디저트에게 나의 감정에 대한 모든 것을 위임한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해 보여도, 솔직한 이야기로는 그저 감정에 대한 책임 전가일 뿐이다.
내가 과거의 그에게 그러했듯, 나는 여전히 내 감정에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렵다. 겉으로는 강한 척 해도, 아직도 마음속의 어린 내가 한 겹의 베일 뒤에 숨어 쭈뼛거린다.
언제쯤이 되어야 나는 진정한 홀로서기를 완성할 수 있을까.
혼자여도 괜찮다고 하지만, 엄연히 말하면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함께 살고 있는 작은 거인에게 알게 모르게 의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성장하여 집을 떠나는 날을 상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찌릿하고 아파온다. 그래서 나는 아직 언제가 될지도 모를 그날을 위해, 하루하루 조금씩 미리 이별을 연습하고 있다.
감정의 분리, 아이와 나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한 노력, 그것들을 꾸준히 해나가며 나의 작은 거인과 함께 각자의 삶을 향해 진짜 독립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엄마로서, 그리고 나로서, 온전히 설 수 있는 그날까지 당분간은 티라미수에게 나의 기분을 조금 부탁해 봐야겠다.
NO OVEN RECI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