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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Sep 17. 2020

지금이 아니었으면, 영영 떠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인도로의 마지막 여행

 일기장 한 켠에 적힌 버킷리스트를 보며 절로 한숨이 났다. 인도 북부에 있는 판공초 호수와 타지마할 여행. 그리고 삼 년간 기다려왔던 히말라야 등반. 인도로의 이직과 함께 호기롭게 세웠던 올해의 계획들은 3월의 락다운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3월 중순에는 국내선이 중단되었다. 티베트 마을이 있는 맥그로드 간즈 트레킹을 위해 예약한 비행기표와 타지마할행 티켓은 강제로 취소당했다. 고심 끝에 등록한 요가 클래스와 골프 레슨은 환불조차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더 이상 부질없어진 목표로 가득한 종이 쪼가리에는 천지가 개벽해도 이룰 수 없는 일들만이 남아 있었다.


 사실 나의 상황만 이렇게 안쓰러운 것은 아니니, 누굴 탓하겠냐마는. 유난히 아쉬움이 많은 한 해였다. 열심히 놀았다곤 하지만 막상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느긋하고 나태했다. 여행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선 여유를 부리면 안 되었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을 때 떠났어야 했다.



 당시 하우스 메이트는 여행을 싫어했다. 여행을 싫어한다고 말한 이는 살면서 처음이었다. 낯선 곳을 돌아다니는 게 싫고 귀찮으며,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여행을 해도 감흥이 없다니. 심지어 여행이 낭비라니. 그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못했으나 같이 사는 사람에 대한 일종의 배려로 나는 여행 얘기를 잘하지 않았다. 실은 그때부터 내 여행에서 남의 눈치를 봐야 했다. 트레킹을 간다고 선포하는 대신 그녀가 흡족할만한 동네 카페 마실을 선택했다. 나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겐 낭비와 사치로 비춰진다는게 싫어서 결코 동의하지도 않는 생각에 맞장구를 치는 식이었다. 그렇게 떠남에 대한 나태함으로 여행을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락다운이 시작되었다.

 

 마침 조드푸르에서 친해진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잘 살아있냐는 안부와 함께, 나는 그의 게스트하우스에 아직도 여행객이 있는지 물었다. "미쳤어? 지금 이 상황에 손님이 있냐고?" 갑작스러운 락다운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 한 사람들 혹은 장기 투숙객이 있는지 궁금했던 건데, 그의 대답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5월 달에 그와 같이 가기로 했던 리시케시 여행은 아무래도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다음 주엔 나아지겠지. 혹은 다음 달엔 풀리겠지라는 생각들도 큰 오산이었다. 네 달간 인도에서는 국내는 물론, 근처 동네에서도 이동할 방법이 전무했다. 식료품점, 약국, 배달 가능 식당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곳이 문을 닫았다. 완전한 재택근무의 시작이라 함은 곧 모든 여행 계획의 무산이라는 뜻이었다.



 집에만 있는 것이 가장 힘든 나로서는 지옥 같은 시간들이었다. 이맘때쯤이면, 히말라야를 구경하고 여행자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을 텐데. 나태함은 나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미처 떠나지 못 한 도시의 이름들을 슬프게 곱씹어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출력해놓은 E 티켓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인도에 왔는데, 타지마할도 갠지스강도 가보지 못했다. 심지어는 세 얼간이로 유명세를 탄 판공초 호수도,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던 네팔의 히말라야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인도에 온 이유 중 팔 할은 여행을 하기 위함이었는데, 여행을 싫어한다는 다른 이의 말에 이른 도전을 주저했던 나 자신이 제일 안타까웠다.


 하지만 돌아보니 어쩌면 올해가 아니면 영영 인도에 가지 못 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던 시간은 두 달 남짓이었지만 인도에서 걱정 없이 여행을 할 수 있던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몰랐다. 국제선이 닫히고 나서 거진 5개월 만에 전세기를 타고 들어왔으니, 여행자들은 진작 떠났겠다 싶었다. 그리고 이제는 상황이 더 심각해진 인도에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여행자가, 아니 그런 여행 자체가 앞으로 존재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인도에 가야 했다면 올해가 정말 마지막이었을 수도 있다고. 그 마지막 기회를 내가 누리고 온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인도였다. 후반부의 감금 생활을 제외하면 여섯 개의 도시를 돌아다니고, 주말마다 맥주를 마시며 발리우드 노래에 춤을 췄다. 계획했던 1년에 비해선 턱없이 짧은 여행이었지만 분명 그곳에서의 시간들은 나에게 깨달음과 변화를 주기에 충분했다.



 내가 이때 인도에 가지 않았다면, 코로나 이후엔 감히 인도에 갈 생각 조차 하지 못 했을 것 같았다. 인도를 간다는 이에게 바보 같은 소리라며 혀를 내둘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웠던 인도를 경험했고, 입에 담기조차 버거웠던 락다운을 버텨냈기에. 그리고 이제는 지난했던 인도에서의 삶을 웃으며 묘사해낼 수 있기에. 이상하고 정신없으면서도 한없이 매력적인 인도의 매운맛을 봤기에. 언젠가는. 살면서 언젠가는 다시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올해 그곳으로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코로나 이전의 인도를 몰랐을 테다. 한 때는 따뜻했고, 가끔은 고독했던 인도를 경험하지 못했을 테다. 무모한 용기가 괜찮았던. 어쩌면 무모함이 당연했던 때를 겪었기에 다음에도 올해와 비슷한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의 행복에 대한 잣대를 조금은 거둘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가 다시 나의 방황을 붙잡고 말려도, 다시는 타인을 위해 나의 행복을 포기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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