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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서신문 Jan 10. 2020

‘軍 불온서적’ 출판사·작가 승소가 건네는 질문

2008년 불온서적으로 선정된 책들.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생각하지 마. 허락하는 책만 읽어.” 생각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정한 ‘옳고 그름’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인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2008년 국방부가 23종의 ‘불온서적’을 지정한 데 반발해 소송을 제기한 출판사와 저자들이 10여 년 만에 배상을 받게 됐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원고는 녹색평론사·당대·보리·한겨레출판·후마니타스·철수와영희·615출판사와 김진숙·한홍구·홍세화 등의 저자다. 지난해 12월 서울고등법원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200~500만원 배상) 판결이 내려진 데 대해 지난 8일 국방부가 상고를 포기하면서 배상 판결이 최종 확정됐다. 다만 615출판사의 『핵과 한반도』 『북한의 미사일 전략』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은 이적표현물 혐의를 벗지 못해 여전히 불온서적으로 남게 됐다.


소송은 2008년 이명박 정부 당시 국방부가 스물세권의 불온서적 명단을 발표한 데서 비롯됐다. 당시 국방부는 한국대학생총학생연합회(한총련)가 군대에 책 보내기 운동을 계획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해 불온서적을 지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총련은 “책 읽는 운동을 준비한 건 맞지만 군대에 책 보내기 운동을 계획했다는 건 사실무근”이라며 해당 사실을 부인했고, 일각에서는 ‘한총련이 선정하면 무조건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책인가’라고 비판했다. 또 당시 불온서적의 판단 근거가 모호해 금지서적으로 지정된 책의 저자와 출판사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문제인 거냐”며 반발했지만, 군은 “군대 기준이 사회와 다를 수 있다”는 답 외에 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당시 군의 불온서적 지정은 일반 국민 눈높이와 차이가 있었다. 신자유주의적 조류에 대한 반박 논리를 담은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의 책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이 대표적이다. 당시 군은 이 책을 “반미, 반자본주의를 조장하는 반정부 도서”라고 주장했지만, 대중의 인식은 달랐다. 미국에 반대하기보다 미국이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의 계획 경제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독자가 다수였다. 이 책은 지금껏 전 세계 20개국에 수출돼 70만명의 선택을 받았다.

2011년에는 기존 23종에 12종을 더한 불온서적 목록이 공군 일부 부대에 전해졌다. 그중에는 국어 교과서에 실린 최성각의 에세이 『달려라 냇물아』, 전태일의 전기인 위기철의 『청년 노동자』,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 추천 도서인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 교수의 『비판적 평화연구와 한반도』, 카지노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 2007년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슬롯』이 포함됐다. 당시 군은 국방부나 공군 사령부에서 금서목록을 하달한 적이 없다고 밝혔지만, 이후 해당 서적에 대한 일제 점검을 시행한다는 전투비행단장 명의의 공문이 발견되면서 개별부대 차원에서 금서 조치가 이뤄진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물론 불온서적을 관리하는 군의 의도가 전혀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다. 자의적 해석을 배제하고 복종을 절대시하는 명령체계를 갖추기 위해서 사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서적을 배제하겠다는 의도는 분단국가에서 나름의 타당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민주주의가 사회주의보다 절대적 우위를 점했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필요 이상으로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더욱이 복무를 강제하는 징병제 체제에서 2년여간 ‘독서권’을 침해하는 것은 과도한 제재라는 주장이 군 내부에서도 나온다.


실제로 2008년 일곱명의 법무관은 군의 불온서적 지정이 장병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다만 2010년 불온서적 지정은 합헌으로 판결됐고, 그 사이 군은 “지휘계통을 통한 건의 절차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한 법무관들에게 파면(지영준·박지웅), 감봉 1개월(한창완), 근신 5일(이환범·신성수), 견책(신종범)의 징계 처분을 내렸다. 이들 중 일부는 오랜 소송 끝에 2018년 말 징계가 위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을 얻어냈다.


불온한 사상이 담겼다는 의미를 지닌 불온서적. 부대 내 핸드폰까지 허용돼 e북 형태로 제약 없는 독서가 가능한 현 상황에 불온서적 선정의 실효성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이 세상에 불온한 사상이란 게 존재하긴 하는지. 존재한다면 상징성을 위해 남겨둬야 하는지 고민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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