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스텀 키보드’
예부터 책 읽는 사람 곁에는 늘 붓과 먹, 종이와 벼루가 있었다. 읽는 행위와 쓰는 행위는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읽는 자는 썼고. 쓰는 자는 또 읽었다. 오늘날 우리도 다르지 않다.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읽어대고 또 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곁에는 무엇이 있는가. 읽는 행위를 창조 행위와 연결하는 新문방사우를 소개한다.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은 좋은 필기구가 갖고 싶기 마련이다. 기자는 대학 때 돈을 모아 키보드계의 ‘끝판왕’이라는 ‘해피해킹 프로2’를 산 적 있다. 물론 지금 시국이라면 구매를 고려하지 않았을 테지만,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가장 좋다고 소문난 기성품 키보드는 단연 일제 ‘해피해킹’이다.
‘해피해킹’은 마니아들이 많다. 키캡이 하우징(키보드 몸체)에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부드러운 바둑판에 바둑알을 올려놓는 소리, 혹은 둥근 자갈이 물속에서 부딪힐 때 나는 소리 같다. 초콜릿을 부러뜨리는 소리라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키캡에 손가락을 올려놓기만 하면 부드럽게 쑥 들어간다. 그래서 아무리 타이핑을 해도 손가락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이름에 ‘해킹’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처럼 프로그래머들에게 맞춰진 독특한 키 배열은 익숙해지기만 하면 여타 키보드를 사용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작업할 수 있다. 한번 사 놓으면 평생 쓸 수도 있다. ‘해피해킹’은 ‘정전용량무접점’(축전기의 축전량 변화를 측정하여 키가 눌렸는지 감지하는 방식으로,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방식이기 때문이다.
가장 비싼 키보드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마니아들이 많다. 유명한 키보드 동호회 사이트 ‘키보드매니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키보드다. 키캡 하나가 몇만원 선에서 거래되고, 이용자들은 키캡에 다양한 문양을 프린팅하기도 한다. 키보드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이 ‘언젠가는 꼭 사야지’ 하는 키보드다. 작가 허지웅이 사용하는 키보드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러나 양산되는 기성품이란 늘 그렇듯, 아무리 비싸더라도 사용하다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 마치 사이즈 275짜리 구두를 샀는데 정확한 발 사이즈는 276일 때, 와이셔츠를 고를 때 100은 조금 작고 105는 클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바둑판에 바둑돌을 놓는 듯한 품격 있는 소리가 알고 보니 고막을 때리는 소음이었고, 너무 잘 눌리는 키캡이 너무 쉽게 눌려서 오타를 유발할 때, 그래서 차라리 꾸덕꾸덕한 타건감(타자를 칠 때 느껴지는 손가락의 감각)의 저렴한 멤브레인 키보드가 그리워지면, 아무리 비싼 키보드라도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이 된다. 그래서 대다수는 기성품을 사고 나서 적당히 타협한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계속 사용하거나, 자신에게 그나마 더 맞았던 키보드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책 『심미안 수업』의 저자 윤광준이 지난 인터뷰에서 “이상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상이 영영 자신한테 올 확률은 없어지는 거죠”라고 했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마니아 중 마니아다. 그들은 기성품에서 자신에게 맞지 않는 부분을 맞게 고치거나 심지어 자신에게 맞는 키보드를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기성품이 유니클로라면, 이들이 입는 옷은 맞춤 양복이다. ‘키보드 커스터마이징’이다.
사실, 기성품을 수정하거나 기성품을 이용해 더욱 완벽한 키보드를 만드는 ‘키보드 커스터마이징’의 원조는 우리나라다. 지금이야 외국에서도 ‘커스터마이징’을 하는 이들이 많지만,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의 ‘커스터마이징’이 세계 제일로 평가받았다.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의 C를 K로 바꿔 ‘쿠스터마이징’(Kustomizing)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지금도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키보드 커스터마이징’은 한국이 세계 최강국이다.
‘커스텀 키보드’란 말 그대로 사용자의 입맛에 맞게 조립하는 키보드다. 키보드의 구성품인 하우징, 기판(PCB : 집적 회로, 저항기 또는 스위치 등의 전기적 부품들이 납땜 되는 얇은 판), 스위치(축), 키캡, 보강판 등을 직접 구매 및 제작하거나 ‘공제’(공동제작)해 직접 조립하거나 공방에 조립을 맡긴다. 재료를 모두 따로따로 구매해야 하기 때문에 제작기간은 4개월에서 6개월이 소요된다. 가격은 어떤 재료를 구매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나, 보통 가장 비싼 키보드가 30만원 대에서 형성된다.
‘커스텀 키보드’의 꽃은 단연 하우징이다. 스위치 등 기타 재료는 생산하기 까다롭지만, 키보드의 몸체인 하우징은 설계도를 공장에 맡겨 OEM 방식으로 비교적 쉽게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설계자들에 의해서 다양한 하우징이 설계된다. 자신이 설계한 하우징을 사용해 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소비자들은 키보드 동호회나 설계자의 블로그 등을 통해 설계자의 하우징을 ‘공제’(공동제작)한다. 이 외에 스위치, 키캡 등 다른 부품은 ‘체리’, ‘카일’, ‘게이트론’ 등 다수의 스위치 제작 회사에서 만드는 다양한 제품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보통 자체 설계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커스터마이징 키보드’의 세계에 한 번 빠져들면 ‘그냥 기성품을 사면 되지 않느냐’는 말은 정말 무색하기 짝이 없다. 같은 스위치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하우징, 다른 보강판, 다른 키캡, 다른 스프링을 사용할 경우 느낌이 다 다르다. 윤활 여부, 필름 사용 여부, 중량판 사용 여부, 스프링 무게에 따라서도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그저 스위치(청축, 흑축, 갈축, 적축, 정전용량무접점 등)가 타건감, 타건음(타건할 때 나는 소리)을 결정한다고만 알았다면 오산이다. ‘커스터마이징 키보드’에 빠진 이들은 키보드의 타건감을 “청축 80%에 적축 20% 정도 느낌이 난다” “체리 흑축 느낌에 정전용량무접점 느낌이 가미돼있다”고 묘사한다. 이들이 자신만의 타건음을 만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기 싫은 사람들이 만드는 ‘자신에게 완벽하게 맞는 키보드’, 그래서 한 번 빠져들면 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