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의 『아리랑』
편집자주 - 글을 읽고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가슴을 두드립니다. 그 상상을 실제 상황과 맞춰보는 것은 또다른 재미이지요. 저자가 처했던 상황, 시대 배경 등에 대한 이해는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모티브가 됩니다. <독서신문>이 근현대 문학 배경지를 찾는 기행을 시작합니다.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서울에서 김제로 향하는 KTX는 평온했다. 차창에는 신록이 가득했고 승객 표정도 밝았다. 하지만 김제 철길이 1900년대 일제가 기초한 것이고, 일제 수탈의 전초기지로 사용됐다는 것을 떠올리자 금세 둔탁한 기운이 들었다. 일제는 철도 부설을 ‘조선의 발전’을 위해라고 말하지만 실제는 전쟁터로 군인을 나르고, 일본으로 수탈 물자를 옮기기 위한 도구였다.
김제는 조정래 작가의 소설 『아리랑』(해냄)의 배경지이다. 철길 위에서 (동포 등골을 빼먹는 일제 앞잡이를 때렸다는 이유로) 철로 건설에 강제 동원된 ‘지삼출’을 떠올리는 사이 기차는 ‘김제만경 너른 들판’이 자리한 김제역에 도착했다. 역 뒷편의 논에서는 트랙터가 바삐 움직이며 모내기 준비에 한창이었다.
김제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국내 최대 쌀 생산지이다. 이 때문에 일제 침탈이 시작되던 1903년부터 일제강점기 내내 극심한 착취가 자행됐다. 조 작가는 “토지조사업에 의해 수많은 농민이 농토를 잃고, 만주로 유리방황해야 했다”며 “그런 요인이 김제가 『아리랑』의 배경이 된 이유”라고 밝혔다. 토지사업은 일제가 땅 주인을 명확히 하겠다는 구실로 진행한 토지 측량 사업으로 토지 소유주임을 증명할 수 없을 경우 실소유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전체 토지의 45%가량이 일제에 수탈된 것으로 알려진다.
일례로 1916년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김제지역 경지면적에 대한 일본인 소유 비율은 56.2%였다. 당시 전국의 일본인 소유 비중이 5% 내외였음을 감안하면 김제의 일본인 토지소유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1927년 김제 죽산면의 조선인 농가 1,150호 중 자작농은 4가구에 불과했다.
그런 수탈 상황을 두고 당시 김제 일대의 농장주였던 일본인 하시모토는 소설에서 “흥, 별수 없지, 누가 나라를 뺏기랬나”라고 냉소한다. 그가 사용했던 사무실은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또 일본인의 조선 이주 장려에 따라 상당수의 일본인이 김제에 거주했다. 당시 지어진 일본식 주택 일부는 지금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 흔치 않았던 2층식 가옥으로 지붕에 일본식 시멘트 기와를 올렸다.
이런 배경은 김제역에서 차로 10분 거리(8.3㎞)인 ‘아리랑문학관’에 그대로 소개돼 있다. 아리랑문학관은 2003년 5월 16일 『아리랑』에 담긴 문학정신과 역사의식을 공유하기 위해 설립된 곳이다. 1995년 7월부터 4년 8개월에 걸쳐 원고지 2만 장 분량(총 12권)으로 쓰인 『아리랑』의 시작과 끝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
문학관에는 『아리랑』 줄거리를 몰라도 대강의 줄기를 파악할 수 있도록 챕터별로 줄거리를 잘 정리해 놓았다. 동학운동으로 남편을 잃은 감골댁의 큰아들 방영근이 빚 20원을 갚기 위해 하와이로 팔려 가는 설움, 토지사업으로 땅을 잃은 농민들이 만주로 이주하는 아픔, 만주로 건너간 동포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고통 등을 포괄해서 조명한다,
줄거리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내용이 사실에 기반한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조 작가는 『아리랑』이 취재를 통한 사실에 기반한 작품임을 강조하면서 집필을 위해 “중국 2번, 미국 3번, 러시아 2번, 일본 3번 방문”하는 등 취재여행 과정을 소개한다. 중국과 관련해선 『아리랑』에 앞서 출간한 『태백산맥』으로 국가 안전기획부(현 국정원)에 요주 인물로 ‘찍혀’ 출국이 제한된 상황에서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 박사의 신원보증을 거쳐 출국할 수 있었던 일화를 밝힌다. 취재 현장을 자세히 스케치한 취재 노트도 눈에 띈다.
아리랑문학관에서 택시로 4분 거리(4.8㎞, 요금 약 7,000원)에 위치한 아리랑문학마을에서는 작품 속 내용을 눈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조정래 작품을 찾는 사람은 반드시 찾는 곳이지만 아리랑문학관 사이를 잇는 대중교통편이 여의치 않다. 택시도 잡기 어려운 곳이라 콜택시를 불러 문학마을로 향했다. 택시 기사는 “관계기관에서 봉고차라도 마련해 문학관과 문학마을을 오가게 하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해 부득이하게 택시를 이용하는 관람객들이 많다”고 전했다.
어렵게 도착한 문학마을에는 『아리랑』 속 배경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면사무소. 과거 일제는 군(郡)과 동·리(洞·里)의 자치 질서 해체를 목적으로 지방행정단위인 면(面)에 집중하여 1917년부터 ‘면제’를 실시했기에 당시 면사무소는 일제 통치의 최일선이었다. 면사무소 안에 들어서니 당시 주민들이 경험했을 위압감이 느껴졌다. 당시 일제는 면민에게 영향력 있는 이를 면장에 세워 식민 지배 체제를 구축했고, 보통학교 졸업 이상 학력의 인원을 면 직원으로 뽑아 그들의 신분을 보장하는 대신 행정 말단 권력에 충성하게 하는 방식으로 면사무소를 운영했다.
오늘날 경찰지구대에 해당하는 주재소는 당시 면마다 한 개소가 운영되었다. 당시 순사는 ‘높은 교육을 받지 않고도 상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비교적 취직이 쉬운 직업’으로 경찰 시험에 합격하면 “동네 사람과 친척 등 50~60명이 줄을 지어 환송”하는 환대를 받았다. 소설 속 장칠문이 아버지의 도움으로 순사가 되려 한 것도 그런 권세를 누리기 위함이었다.
정미소에서는 예쁜 쌀을 골라 모으는 작업이 이뤄졌다. 주로 여성이 근무했는데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쌀을 몰래 먹다 걸리면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면서 직업까지 잃었다.
감골댁과 같은 일반인들이 살았던 초가집과 당산나무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당산나무는 마을 공동체의 상징으로 일제는 마을 공동체의 신성한 공간을 훼손함과 동시에 민중에게 두려움을 주는 효과를 누리기 위해 당산나무 아래에서 처형을 집행하곤 했다. 소설에서는 조선총독부의 강압적 토지조사사업에 반대하고 나선 차갑수가 당산나무 밑에서 공개총살 당한다.
조 작가에 따르면 『아리랑』 집필을 구상하던 1990년대 초, 외신기자 두명이 찾아와 “이젠 잊어버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 “유태인들은 용서를 했는데 한국은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있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조 작가는 “독일은 수상 빌리 브란트가 전 세계를 향해 사과했고 유태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는다’는 민족적 동의에 도달했다. 하지만 일본은 교과서를 왜곡하고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망언을 일삼는다. 용서를 받아야 할 자들이 용서를 빌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라는 것인가”라고 답했다.
국내 최대 곡창지대였던 김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구 밀도가 전국 평균을 웃돌 정도로 번성했다. 1989년에는 김제군에서 김제시로 승격되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대도시로 빠져나가는 사람이 늘면서 규모는 줄고 있다. 2011년 9만여명이었던 인구는 2020년 기준 8만명 가량으로 줄었다.
『아리랑』을 통해 일제의 침탈사를 고발한 조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만이 아니다. 미래의 설계가 또한 역사다. 우리는 자칫 식민지 시대를 전설적으로 느끼거나 피상적으로 방치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러나 민족분단의 비극이 바로 식민지시대의 결과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는다면 그 시대의 역사를 왜 바르게 알아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