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풍경이나 사물은 낡아 스러질 때야 비로소 자신을 증거한다. 한때 견고하게 뻗어 있던 저 성벽들이 이제는 시간의 무게를 받아들였다. 단단했던 벽의 균열은 몰락의 징후라기보다 오랫동안 견뎌온 시간의 주름이다. 비와 햇빛이 번갈아 스쳐 간 자리에 사람들의 하루가 얇은 층으로 쌓였고 어느새 벽의 색깔이 되었다.
창문들은 이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 어떤 것은 닫혀 있고 어떤 것은 바람을 기억하며 열려 있다. 그 사이로 흘러갔을 수많은 저녁, 누군가의 웃음, 혹은 말하지 못한 하루의 피로가 머물러 있다.
어쩌면, 펼쳐진 한 권의 오래된 책이다. 그렇다면 천천히 읽히는 시간의 문장들을 바라봐야겠다.
시간이 사랑하는 것은 조금씩 닳아가는 것들, 그리고 빛과 바람이 오래 앉을 수 있는 자리다. 그러므로 사라진다는 것은 완전히 없어지는 일이 아니라 그저 자리를 조금 비켜 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완전하려는 욕망을 내려놓을 때 드러나는 것, 그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쇠락이 지닌 고요한 아름다움이다.
삼각지. Ricoh GRD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