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세계의 첫 질문은 ‘이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였다. 이에 대해 탈레스는 물을, 크세노파네스는 흙을,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그 대답으로 내놓았다. 이들은 세계를 이루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찾고자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대답은 불이었다. 그런데 이 대답은 다른 이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무엇이 세계를 이루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지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불은 흔히 말하는 연소 현상으로서의 불이 아니다. 타오르고 사라지는 과정으로서의 불이다. 불은 태우면서 동시에 재를 남긴다. 무언가가 사라지면 동시에 다른 무언가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 단순한 현상에서 어떤 원리를 읽어냈다. 그건 바로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변화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생성과 소멸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차이’로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낮이 있어야 밤이 있고, 배고픔이 있어야 포만이 있다. 심지어 삶과 죽음 또한 서로의 그림자처럼 맞닿아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조건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립은 단순한 충돌이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다.
이 생각은 나중에 헤겔의 변증법과 니체로 하여금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읽어내도록 했고, 데리다의 해체의 개념에도 닿았다. 여기에 더해 질 들뢰즈는 아예 ‘차이’ 그 자체를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충돌하고, 충돌하기 때문에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세계는 조화로워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어긋나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건지 모른다. 균열이 없다면 움직임도 없고, 움직임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사실 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은유였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고, 내일의 나는 또 다른 존재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매일 조금씩 달라지며 살아가는 일. 그것이야말로 각자의 삶이 소모되면서도 동시에 새로워지는 방식 아닐까.
오늘 첫 봄꽃을 봤다. 매년 보는 진달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 꽃은 작년과는 다른 꽃이다. 그러니 내년에는 또 다른 꽃을 보게 될 것이다.
나의 이 생각이 바로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말한, 반복되는 삶일지라도 차이를 발견하기 때문에 매일매일 새로워진다는 긍정의 사유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