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언스의 서재 - 음악의 언어(송은혜)
<음악의 언어> (송은혜, 시간의흐름)
밖에서 추위와 싸울 일만 빼고는 겨울만큼 좋은 계절도 없습니다. 딱히 사람들과 번잡스럽게 어울리지 않아도 그리 흠잡힐 일도 적습니다. 두툼한 외투를 입고 뒤뚱거려도 다른 이의 눈을 피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해는 빨리 넘어가고 밤은 길고 깊습니다. 춥고 긴 한겨울 밤에 할 수 있는 즐거운 일 중에 하나는 바로 책 읽고 사색하며 음악을 듣는 일입니다.
음악을 들으며 읽을 수 있는 책 송은혜의 <음악의 언어> (시간의 흐름)는 그런 면에서 지금 같은 겨울에 읽기 딱 좋은 책입니다. 작년 이맘때 출간되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던 음악 에세이입니다. 문득 이 책을 붙들고 음악을 들으며 겨울을 보냈던 기억이 나길래 소개합니다.
이 책의 작가 송은혜는 한국과 미국, 프랑스에서 오르간, 하프시코드, 음악학, 피아노, 반주를 공부했고 지금은 프랑스 렌느 음악대학과 렌느 시립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동네 음악 선생'라고 소개합니다. ‘동네 음악 선생’이란 말에는 위대한 연주자나 음악학자로서가 아니라 뭔가 ‘다정함’ 같은 감정이 담겨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만큼 작가가 들려주는 음악 이야기는 음악이라는 언어를 빌어 큰 부담 없이 독자의 귀에 들어옵니다.
음악은 언어다. 소리로 마음을 주고받는 언어. 언어로 소통할 때 화자와 청자가 있듯이, 음악에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과 그것을 받는 사람이 있다. 독주의 경우 '연주자는 화자, 관객은 청자' 구도처럼 보이지만, 민감한 연주자는 연주장에 흐르는 공기로 청중의 반응을 미세하게 감지하고 그에 반응하기도 하므로 연주자가 청자, 관객이 화자가 되기도 한다. 관객이 입을 꾹 다문 채 듣기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들이 내뿜는 공기와 분위기처럼 솔직하고 강력한 의사 표현도 없다. (음악의 언어 p 83)
작가는 기본적으로 음악을 언어로 바라봅니다. 소리로 마음을 주고받는 언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음악은 너무 좋은 거예요. 음악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한번 들어보세요”라고.
음악이 내는 소리들은 어떤 소리일까요? 그리고 음악이 언어라면 음악이 내는 소리는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걸까요? <음악의 언어>는 그런 의문을 풀어줌과 동시에 음악을 자신만의 언어로 치환하여 감상할 수 있도록 다정하게 알려주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음악 그 자체만을 이야기하는 책은 아닙니다. 음악의 역사라던가 음악가에 얽힌 에피소드가 나열된 내용도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음악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추상성이 언어로서의 역할에 다다르지 못할 때는 단지 음악이 들려주는 선율로도 위로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책은 네 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습니다. 네 개의 챕터는 음악을 해석하고 연주하듯 일상을 기록하며 모두 33개의 변주곡으로 되어있습니다. 작가가 Prelude와 var 17에서도 밝혔듯이 33개의 변주곡은 건반악기 변주곡 분야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쌍벽을 이루는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안톤 디아벨리의 왈츠에 의한 33개의 변주곡)을 닮았습니다. 일반적인 변주곡은 주제의 패턴이 지속적으로 등장하지만 디아벨리 변주곡은 주제 전체가 아니라 한 두 마디의 선율이나 리듬, 화성 등에서 일부의 요소만 취하기 때문에 변주가 변화무쌍하고 자유로운 게 특징입니다. 따라서 곡을 연주할 때에도 매우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마치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33개 변주처럼 음악적 사색과 음악적 요소가 삶과 일상에 얼마나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는지 말해주는 듯합니다.
한 가지 각 변주곡(꼭지)마다 꼭지의 주제로 삼은 클래식 곡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입니다. 한 개의 바리에이션을 읽는 중에 혹은 다 읽고 숨을 고른 후 듣는 맛은 이 겨울 내내 아끼면서 즐길 만합니다.
친절하게도 출판사가 책에서 소개하는 곡들을 묶어 <음악의 언어 Playlist>로 유튜브에 묶어놓았습니다. 별도의 음원을 구입할 필요 없이 책과 함께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마침 첫 번째로 소개하는 곡이 슈베르트의 곡이군요. 그 유명한 겨울 나그네를 말하지 않고서라도 슈베르트만큼 겨울의 쓸쓸함과 잘 겹치는 작곡가도 없는데 아주 절묘합니다. 소개하는 곡은 즉흥곡 2번 Op. 142 (D 935)입니다. 자주 들었던 곡인데도 작가의 경험과 사유를 읽고 들으니 새로운 감흥을 받습니다. 이런 것이 아마도 음악이 우리 삶에 주는 선물 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