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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디언스 Feb 09. 2023

무용한 이 벽도 점점 정감이 가는게 아닌가.

murmur - 무서록>(無序錄)의 벽(壁)에 대한 상념



시인 정지용이 “시는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이라 할 만큼 빼어난 문장을 지닌 작가로 인정받은 상허 이태준은 해방후 이데올로기의 혼란기에 월북하여 생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비운의 문장가다. 그가 자신의 글을 두서없이 기록했다고 하여 이름 지은 수필집이 바로 <무서록>(無序錄)이다.


이태준은 무서록의 첫 번재 글로 벽(壁)에 대한 상념을 이렇게 얘기한다.


뉘 집에 가든지 좋은 벽면을 가진 방처럼 탐나는 것은 없다. 넓고 멀찍하고 광선이 간접으로 어리는, 물 속처럼 고요한 벽면, 그런 벽면에 낡은 그림 한 폭 걸어놓고 혼자 바라보고 앉아 있는 맛, 더러는 좋은 친구와 함께 바라보며 화제 없는 이야기로 날 어둡는 줄 모르는 맛, 그리고 가끔 다른 그림으로 갈아 걸어보는 맛, 좋은 벽은 얼마나 생활이, 인생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일까! (무서록, 범우 9p) 


그가 친구 K군이 입원한 병원 병실의 벽을 두고 쓴 글이다. 여백인 채로, 마치 사막처럼 텅 비어 있는 벽에 이렇게까지 사유를 펼칠 일인가? 한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그랬는데, 오래된 건물의 일부분일 뿐 딱히 다른 용도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이 벽을 보면서 종종 이태준의 글을 생각하게 된다. 어찌된 일이 그림자만 호사를 누리는, 무용한 이 벽도 점점 정감이 가는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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