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생긴 일 5
확인할 것이 있다며 내 핸드폰을 가져간 남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우연히 ‘성북동 개미’라고 저장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것, 깔깔거리며 놀리듯 그게 뭐 어떠냐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남편이 조용하다. 그리곤 다시 핸드폰을 내밀었다.
남편에게 일개미라고 하는 아내는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이냐는 남편의 질문에 AI는 길게도 설명을 늘어놓았다. 긍정적 측면에서 ‘일개미’는 남편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오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여기까지만 했어야지 AI야..) 하지만 문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부정적 측면에서 보자면 남편이 마치 개미처럼 일만 하고, 그 외의 가정생활이나 육아, 감정적 교류에는 소홀하다는 불만이나 비판을 담고 있단다. 돈 버는 일에만 집중하는 경향을 ‘비꼬는’ 의미에 가깝다는 마지막 문장에 밑줄 쫙쫙. 남편은 뒤통수에서 작은 원형 탈모를 발견했던 그날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지 엘리엇의 <미들 마치> 4부의 소제목은 세 가지 사랑의 문제다.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 중심인물들의 사랑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캐소본에 대한 이상적 환상과 함께 그를 향한 헌신과 자신의 고양을 함께 꿈꿨던 도러시아는 캐소본과의 관계에서 늘 정신적 공허함을 느꼈다. 정신적 공허함은 곧 결혼생활의 불행으로 이어졌고 도러시아의 결혼은 캐소본에 대한 실망으로 채워졌다. 로저먼드와 리드게이트의 문제는 서로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로저먼드는 개혁을 꿈꾸는 의사인 리드게이트에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기대했다. 리드게이트 또한 로저먼드의 아름다운 외모만 보고 결혼을 결심한 셈이니 결혼 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 봉착하자 서로의 가치관이 충돌했다. 메리와 프레드는 프레드의 미성숙함으로 인해 문제를 겪었다. 사랑뿐만 아니라 가장 현실적이고 기본적인 사람으로서의 능력 예를 들면 인간으로서의 책임감, 안정적인 직업, 경제적 독립 등의 조건들을 갖추진 못한 프레드와는 지금 당장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메리의 입장이었다. 물론 메리의 믿음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프레드의 삶은 점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를 맞고 있었다. 이토록 다양한 세 가지 사랑의 문제는 단순한 갈등을 넘어 결혼 생활의 현실을 세세하게 드러냈다.
진정한 결혼의 의미는 무엇일까. 결혼이 개인의 이상이나 목표를 실현시켜 주는 수단이 될 순 없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나는 최소한의 기대라는 이름으로 상대에게 끝없는 기대를 했고 해소할 수 없는 실망만 쌓았다. 결혼 후 서로의 바닥을 목격하고 마는 일이야 수도 없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문제들이 그저 상대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서 시작된 일이라 치부시켜도 될까. 15년이나 함께 산다면 어떤 누구와 있어도 서로에게 실망하는 일이 생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 생활에서 내가 기대한 건 뭐지.
대부분의 부부가 그렇듯 평소엔 우리 또한 어지간한 불만은 그냥 넘기기 일쑤다. 하지만 갈등이 생기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는 슬픔과 화가 뒤섞인 감정을 쏟아낸다. 그리곤 네 얘기도 해달라고 독촉하듯 묻는다. 평생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본 적 없는 남편은 내가 그럴 때마다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저 남편의 답을 듣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남편이 느끼기에 우리의 대화 방식은 자신을 구석으로 모는 것으로만 느껴졌을 것이다. 자신의 괴로움이나 어려움, 슬픔을 토로한 적 없는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도 듣는 방법도 모른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우리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다.
남편에게 심각한 몸의 이상이 발견된 이후 나는 늘 남편의 업무량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밤낮 없이 작업하는 촬영팀 덕에 남편의 출퇴근 시간은 형식적인 숫자일 뿐, 휴일에도 현장 문제들을 해결해 달라며 종일 핸드폰이 울린다.(심지어 어느 날 통화목록을 보니 매일 50통이 넘는 전화를 받았다. 남편은 통화를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그걸 꾹 참고 일을 한다!) 통화기록만 봐도 알 수 있는 어마어마한 업무량을 가늠하다 왜 그렇게까지 일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일을 맡기는 대표, 동료 관리자들의 성향이나 일 처리 방식을 지켜본 결과 회사에도 신뢰가 뚝뚝 떨어졌다. 이런 문제들이 내 눈에만 보였을까? 누구보다 남편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의 건강 문제는 심장질환이다. 죽음과 밀접하다. 최근 피검사에선 간수치도 심상치 않았다. 스트레스와 피로 누적, 그릇된 생활 습관에서 비롯된 결과다. 난 남편이 당장 일을 그만두고 몸을 추스른다면 두 팔을 흔들며 환영할 것이다. 돈은 다음의 문제다. 한 때는 시댁과의 갈등이 가장 큰 화두였다면 요즘은 몸을 갈아내는 업무로 인한 갈등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얼마 전, 지친 목소리로 데리러 와줄 수 있냐는 남편의 부탁을 모른 척하지 않고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앞으로 갔다. 종일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하루 사이 초췌해진 모습으로 차를 타는 모습만 봐도 하루의 고단함을 대충 알 수 있었다. 남편이 겪을 삶의 고단함, 사회에서 느끼는 고민을 온전히 털어놓진 않을 걸 알면서도 내가 그의 노고를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는 말을 먼저 뱉었다. 그리고 어떤 대답도 독촉하지 않았다.(보통은 당장 때려치라던가 내가 직접 회사에 불을 지르겠다는 말로 번짐) 잠시였지만 둘 사이에 다른 공기가 맴돌았다. 나는 내 마음을 쏟아내는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번이고 말을 삼키고 적당한 단어를 골라 정돈된 마음으로 남편을 마주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편도 회피보다는 최소한의 대답..(어.. 맞아.. 나도 고민하고 있어..) 정도는 하는 성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둘에서 셋으로, 넷으로 가정을 이루고 나이 들어가는 동안 우리가 처한 상황은 시시때때로 변했다. 사랑의 형태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니 지금 우리가 느끼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17년 전의 그것이 아니더라도 전혀 아쉽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가 가진 소통의 미숙함을 인정하고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너무나 투박하기 짝이 없지만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한 서로의 모습을 오래도록 지키고 싶다. 내가 바라는 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이 글은 #미루글방 #고전하며글쓰기 에서 조지엘리엇의 <미들마치>를 읽고 쓴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