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부침개
서운한 기억, 엄마에 대한 흔적은 그저 감사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비 오는 여름날이었던가,
K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일기 낭독을 하러 간 적이 있다.
어릴 때도 글과 글씨 쓰는 것을 좋아했던 편이라 일기 쓰는 것을 숙제로 여기기보다는 내 이쁜 글씨를 뽐내고 길게 문장을 펼쳐 보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낙이였다.
그랬기에 담임선생님께서도 내 일기가 낭독해도 될만한 수준(?)이라 판단되셨던지 어느 날 나를 따로 불러내서 권하셨다.
라디오에 나가서 10분 정도 일기 낭독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그날은 부슬부슬 비가 왔다.
낭독을 하고 5천 원짜리 소정액 교환권을 받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는 길엔 당연히 엄마가 내가 일기 낭독한 것을 녹음해 두셨겠지?라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집 문을 들어서는 순간
'아.. 녹음은커녕 듣지도 않았구나..'
엄마의 처진 눈과 벌건 양볼이 말해주었다.
술을 마신 엄마의 얼굴은 말짱할 때의 얼굴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냥 정말 다른 사람의 얼굴빛이었다.
술은 마신 상태였지만 그래도 비 오는 날이라 그랬던 걸까,
부침개를 하고 계셨다.
나는 그 당시에 특출 나게 공부를 잘했던 것도, 예체능에 재능이 있었던 것도, 성격이 밝고 살갑던 아이도 아니었기에 그나마 어깨 으쓱할 수 있는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다소 의기양양하며 집에 들어섰던 건데 칭찬받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술에게 밀려버렸다고 생각이 들자 그렇게나 엄마가 미울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딸이 라디오에 나왔는데 들어보지 않을 수가 있어' 따지고 싶었지만 어차피 취해있는 엄마에게 있는 힘 다해 패악을 부려봤자 내 힘만 빠질 거란 걸 알았기에 마음 깊이 서운함을 묻어둔 채 지나간 것 같다.
오래전 기억이라 그날의 내 말과 행동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 마음 상태는 어렴풋이 호출이 된다.
엄마가 내 일기 낭독 차례가 될 때까지 라디오를 옆에 끼고 앉아 녹음 버튼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은 채 호들갑을 떨며 우리 딸 목소리 언제 나오나 하면서 녹음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면, 그래서 그 녹음테이프를 내게 선물로 건네주었다면 그것이 내 완벽한 기대치에 부흥한 시나리오였기에 행복은 했을 것이다.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지금도 참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좋은 기억이 아니어도 괜찮다.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지금,
달리 생각해보면 서운한 기억이라도 남겨져있어서 충분히 감사하다.
술에 취해 뒤집던 그 부침개도 결국은 내 입에 넣어주기 위함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