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안방에 저렇게 '세로로 된 거' 있으니까 좋다." 아들이 말하는 세로로 된 물건은 바로 장농이다. 우리 집에는 결혼 이래 장농이 없었다. 신혼 초 블라인드를 잡아당겨 올리고 내리는 선반식 수납함을 이용해 오다가 몇 번의 이사와 늘어나는 식구로 인해 하나 둘 내다버리고 서랍장과 봉으로 된 옷걸이를 사용해 왔다.
그러다 이번에 중고로 장농을 하나 들이게 되었는데 태어나서 지금까지 집에 장농이라는 물건을 본 적이 없다보니 그 단어를 입에 올릴 일도 없었고 흔하게 들었던 단어도 아니었던지라 '장농'이란 단어를 모르고 있던 아들.
아들 시선에 서랍장은 가로로 되어있다보니 길게 문이 몇개 달려있는 장농은 당연히 세로로 된 물건인 것이다. 그런데 그 표현을 하는 아들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처음엔 귀여워서 미소지었고 다음으로는 순수하다는 생각과 함께 어른들은 얼마나 아이들이 (원하건 원치않건) 많은 것들을 주입시키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모이기에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체험하게끔 하고싶은 건 사실이다. 나 또한 그렇기에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최대한 밖에서 놀게 했고 모험심을 심을 수 있도록 도왔다. 창의력을 중요시하고 있기에 색종이 접기도 많이 하고 이것저것 몰입해서 만들 수 있는 시간도 나름 많이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해도 그것은 내 기준이고, 객관적으로 나는 과연 얼마나 아이에게 엉뚱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는고 하니 그닥 충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장농을 '세로로 된 거'라고 대답할 수 있는 백지상태를 많이 만들어주지 못한 것 같다.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여백을, 내가 다 가로채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많은 것들을 엄마의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다면 아이는 아담처럼 "사자" "나무"하며 이름지어줄 능력이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더 충분히 기다려줘야 할 것이다. 아이가 모르는게 아직은 많다는 사실이 참 흥미롭고 신선하고 설레는 경험이었기에 그 기쁨과 희열을 아이 스스로가 더 느끼게 해주고싶다.
아이가 먼저 묻기 전에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 할지라도 많은 것을 쏟아붓듯이 전해주는 방식도 조금은 지양해야 함을 깨닫는다. 아이들의 무지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보배로운 현상이기에 그 빛나는 무지를 지켜주는 엄마가 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