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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Sep 05. 2021

배속을 낮추고 음미하기

언젠가부터 정속도로 영상을 보는 게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튜브를 볼 때도 1.5배속은 기본이고 빠르게 훑고 싶을 때는 2.0배속, 그조차도 길게 느껴지면 댓글에 유튜브 영상을 요약해준 게 있나 살펴보곤 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유튜브에서 짧게 요약해주고 해석해주는 15분짜리 영상을 보곤 했다. 그것만 봐도 영화의 스토리, 영화가 주는 교훈 정도는 알 수 있으니 2시간을 절약하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게 영화를 요약본으로 보고 나면 그 영화에 나오는 인물, 대사, 장면 그 어떤 것도 기억에 남지 않을지라도.. ㅎㅎ그렇게 10분 컷 과자를 먹듯 영화를 보고 나니 뭘봐도 그닥 재미가 없었다. 이제는 뭘 봐야 재밌나 싶었다.



그러다 최근 화제의 프로그램 [환승연애]에 관심이 갔다. 처음에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이제 별게 다 예능으로 나온다 싶었는데 주변 지인들이 한번 보면 멈출 수 없다길래 뭔가 다른 매력이 있나 싶었다. 이미 화제가 되는 만큼 지금까지의 서사는 손쉽게 블로그에서도 1분 안에 파악이 가능했기에 나는 사전에 출연진의 서사를 글로 빠르게 파악하고 뒤늦게 [환승연애]에 뛰어들었다. 이미 어느 정도 서사를 안다고 생각했기에 1회부터 보는 건 지루하게 느껴졌다. 결국 내가 궁금한 건 누가 누굴 선택할지 였기에 나는 한참 훌쩍 건너뛰고 후반부부터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5배로 보다가 내가 미쳐 알지 못하는 출연진의 서사와 감정 흐름이 공감되지 않고 뜬금없이 느껴질 때쯤에는 흥미가 떨어졌고 그럴 때면 나는 2.0으로 속도를 내며 보았다. 그러다 보니 속도는 더 빨라져서 출연진의 작대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알겠는데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환승연애] 보길 중단하고 인스타를 보는데 환승연애의 한 컷이 보이는 거다.



'오잉 재밌는데 뭐지? 내가 놓친 건가?' 싶어서 다시 환승연애를 켜서 보는데 이번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속 1.0으로 보았다. 정속으로 보니 그 현장의 긴장감, 말로 표현되지 않는 인물의 감정이 느껴져서 나 또한 몰입하고 있었다. 대화가 끊긴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흥미진진했다. 2배속으로 볼 때는 제3자 관찰자였다면 1.0 정배속으로 볼 때는 내가 응원하는 출연진에 빙의되어 같이 설레어하고 화나고 짜증 나곤 했으니깐. 그렇게 온전히 몰입하는 순간 나는 정배속이 느리다고 느껴지지도 않았고 빠르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2.0배속으로 보면 그냥 넘어갔을 장면도 1.0배속에서는 흥미롭게 보였다. 정배속은 그 흐름과 감정과 서사를 이해하기 딱 좋은 속도였다. 같은 장면인데도 2.0배속과 1.0배속에서 느껴지는 건 달랐다. 왜 그랬을까?



2.0배속은 현재 나오는 장면에 몰입하기보단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데??'라는 다음 결과에 몰입해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마음이 흘러가는 미묘한 흐름을 보는 게 지루했다. 반면, 1.0배속은 온전히 그들의 속도에 발맞춰 몰입하였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현재 그들의 감정과 분위기에 집중하였다. 그렇게 보니 대화가 빈 시간 또한 의미가 있었다. 내 나름대로 그들의 감정을 유추해보기도 하고 평가해보기도 하고 빙의되기도 했으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누가 시켜서 보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걸 보는 시간의 효율을 따지며 최대한 짧은 시간에 재미를 찾으려고 했다. 효율과 재미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아무것도 잡지 못한 나는 효율을 내려놓고 재미에 집중하였다. 그제서야 나는 그 장면에 몰입되어 비로소 진짜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즐거워지자고 행복해지자고 시작한 땅고인데도 무슨 성적표라도 받는 기분으로 이를 악물고 배웠다. 그래서 어느새 진이 빠져 그만둔 거였지.

우리는 뭘 하든, 공부처럼 일처럼 한다. 너무 바쁘다. 빈틈이 없다. 취미에서도 가성비를 찾고, 여행에서도 가성비를 찾는다.

[지속가능한 반백수 생활을 위하여] 中



그러고 보면, 우리는 취미도 일도 삶도 효율을 제1순위로 바라보면 살고 있다. 시간을 아끼고 아껴 최대한 많은 일을 하며 효율적으로 사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 속이 어떨지라도. 그런데 그렇게 100m 달리기 하듯 매 순간을 달리기만 하면 날씨의 선선함이 주는 시원함도, 계절에 맞춰 나오는 제철과일도, 하루 끝에서 저물어가는 분홍빛 노을도 어떤 느낌인지 잊어버리곤 한다. 때로 나를 즐겁게 만드는 소소한 것들을 음미하는 법마저 잊어버리면 어느새 인생이 소모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음미하는 여유는 우리가 더 많은 걸 경험하게 하지 못해도 하나를 경험해도 확실히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배속을 높여 삶의 효율에 높이는 것에 길들여졌던 나도 이제는 하나하나 음미하는 시간을 늘려보려고 한다. 향도 맡아보고 꼭꼭 씹어보고 다른 음식과의 궁합도 상상해보면서  하루를 천천히 즐겨보면  풍성해지지 않을까?


P.S. 뭘해도 뭘봐도 재미없는 노잼시기라면, 해야만 하는 to-do list를 내다버리고 일상의 속도를 줄여보자. 의무감을 벗어던지고 속도를 줄이는 것만으로 내가 놓치고 있던 소소한 재미가 꽃필테니!


때로 팩트보다 중요한 건 해석이다. 팩트 자체에 매력이 넘친다면 두말할 나위 없겠지만,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사물과 사실 속에도 숨겨진 매력은 있을 수 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수박은 천지개벽의 과일이고, 남루한 인생을 견디게 해주는 보석 같은 기쁨을 주는 과일이다.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 옷의 보푸라기도 멋져 보인다. '어쩜 저렇게 사람이 소탈하지?' '오래된 옷 같아서 오히려 힙해 보이네.'

중요한 건 해석이다. 들여다보고, 매력을 찾고, 음미하는 것이다. 인생은 음미할 줄 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선물한다. 그러니 음미할 줄 아는 것은 분명 대단한 재능이다.


 [없던 오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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