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의 시대, 팩트의 파산

by Peter Kim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소리 없이 번쩍이고 있었다. 낡은 고시원 침대가 아닌, 매끄러운 금속 질감의 차가운 침대 위였다. 창밖으로는 공중에 떠다니는 레일과 홀로그램 광고판들이 가득했다. 냉동 수면이었는지, 혹은 알 수 없는 시공간의 뒤틀림이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뱃속에서 들려오는 천둥 같은 허기가 생존의 문제를 일깨웠다.


민준은 비틀거리며 거리로 나섰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사고팔고 있었다. 길가에 놓인 무인 가판대에는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가 놓여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주머니를 뒤졌지만, 손에 잡히는 건 21세기의 쓸모없는 동전 몇 개뿐이었다.


그때, 앞서가던 여자가 가판대 앞에 섰다. 그녀는 지갑 대신 결제 단말기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가 오지 않는 행성에서 온 여행자가 처음으로 빗방울을 맞았을 때, 그것이 하늘의 눈물이라고 믿으며 병에 담아 고향으로 가져가는 이야기.”


단말기에서 은은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가치 산출 완료: 12.5 뉴런].

샌드위치가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민준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뒤이어 온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녹슨 로봇이 버려진 정원에서 죽어가는 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마지막 배터리를 꺼내 꽃 전용 온열기로 만들어주는 이야기.”


[가치 산출 완료: 18.0 뉴런].

사내는 고급 음료까지 챙겨 유유히 사라졌다.


민준은 떨리는 손으로 가판대 앞에 섰다. 단말기에 손을 대자 차가운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결제 수단을 제시하십시오. 상상력을 출력하세요.]


“어… 그러니까… 배가 고픈 남자가 샌드위치를 먹고 싶어 하는 이야기.”


[에러. 산출 가치 0. 데이터의 밀도가 낮습니다. 보편적이고 평범한 사고는 화폐 가치가 없습니다.]


민준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세상에서 화폐는 금이나 종이가 아니었다. 인간의 뇌가 만들어내는 고유하고 독창적인 에너지, 즉 ‘상상력’이 곧 부의 척도였다. 뻔한 이야기, 어디선가 들어본 전개, 감동 없는 서술은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그날부터 민준의 고행이 시작되었다. 샌드위치 한 조각을 얻기 위해 그는 평생 써본 적 없는 뇌의 근육을 쥐어짜야 했다. ‘보라색 태양이 뜨는 바다’, ‘웃음소리를 저장하는 유리병’ 같은 초보적인 컨셉으로 겨우 허기를 면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시스템은 갈수록 영리해졌고, 한 번 뱉은 아이디어는 중복 결제가 불가능했다.


“더 자극적인 거, 더 본질적인 거 없나?”


민준은 길거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옆을 지나가는 이들은 호화로운 비행 자동차를 사고 있었다. 그들은 ‘우주 전체가 누군가의 꿈속이라는 증명’이나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외로움이 신이라는 허상을 물질화했다는 고찰’ 같은 거대한 상상력을 지불했다. 그들에게 세상은 무한한 백지였고, 그 백지를 채울 능력이 곧 권력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살았고, 남들이 짜놓은 시스템 안에서 부품처럼 움직였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건 ‘업무 보고서 양식’과 ‘점심 메뉴 고민’ 같은 평면적인 기억들뿐이었다. 상상력의 빈곤은 곧 절대적인 빈곤이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민준은 해골처럼 변했다. 이제는 작은 물 컵 하나를 소환할 상상력조차 바닥나고 있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도서관과 영화관이 사라진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갈증과 배고픔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중앙 은행’으로 향했다. 그곳은 거대한 물건을 사는 곳이 아니라, 단 한 번의 거대한 상상력을 지불하고 평생의 안락을 보장받는 ‘대작(大作) 거래소’였다.


거래소의 집행관은 무표정하게 민준을 바라봤다.


“무엇을 사러 왔나?”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안락한 삶을 원합니다.”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 그대의 영혼을 관통하는, 단 한 번도 이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거대한 대서사시를 내놓아라.”


민준은 눈을 감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뇌 세포 하나하나를 불태웠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과거의 세상, 즉 상상력이 아닌 숫자에 목매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비틀고 꼬아, 이 미래의 사람들이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지옥’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보이지 않는 숫자의 노예가 되어 서로를 죽이는 세상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그곳에서 인간은 기계의 부품보다 저렴하며, 하늘을 보는 법을 잊은 채 땅바닥의 동전만을 줍다가 늙어 죽습니다. 상상력은 금기시되고, 오직 정답만을 외우는 아이들이 기러기처럼 줄지어 가는 그런 무채색의 세상을…”


민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서늘하고도 기괴했다. 미래인들에게 그 ‘현대 사회’의 모습은 공포 영화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측정 불가능. 가치 산출 중…]


[경고: 데이터의 독창성이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단말기가 미친 듯이 점멸했다. 민준은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성공이다. 이 끔찍한 과거의 진실이 이들에게는 최고의 판타지였던 것이다. 이제 곧 엄청난 뉴런이 입금되고, 자신은 이 화려한 미래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결제 완료 메시지 대신, 붉은색 경고등이 전 도시를 덮었다. 집행관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방금 당신이 지불한 이야기는 ‘상상력’이 아니군.”


“…무슨 소리야? 내 머릿속에서 나온 건데!”


“시스템이 감지했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소멸한 과거의 기록물, 즉 ‘역사’다. 우리 법전 제1조를 잊었나? 사실(Fact)은 화폐 가치가 없다. 오로지 존재하지 않는 것만이 가치를 지닌다.”


민준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자신의 가장 비참했던 현실을 팔아 화려한 미래를 사려 했지만, 이 세상에서 진실은 가장 가치 없는 쓰레기였다.


[잔액 부족. 파산을 선고합니다.]


집행관의 손이 민준의 이마에 닿았다.


“상상력이 고갈된 개체는 사회의 자원을 낭비할 뿐이다. 법에 따라 그대의 마지막 자산을 회수하겠다.”


“마지막 자산이라니? 난 이제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집행관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 하나 남았지. 상상력의 재료가 되는 ‘기억’ 말이다.”


그 순간 민준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어머니의 얼굴, 첫사랑의 이름, 고향 집의 냄새, 그리고 자신이 이 미래로 오게 된 경위까지. 모든 기억이 투명한 실가닥처럼 뽑혀 나갔다. 민준의 눈동자는 점점 초점을 잃고 텅 빈 유리구슬처럼 변해갔다.


잠시 후, 도시의 전광판에 새로운 공고가 떴다.


[신규 매물 등록: '21세기 하급 시민의 기억 패키지' - 판매가 5.0 뉴런]


그것은 아주 저렴한 가격이었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창작의 영감을 얻기 위해 가끔 사가는, 싸구려 자투리 상상력의 재료에 불과했다.


텅 빈 광장 한복판, 이름도 기억도 잃은 한 남자가 멍하니 하늘을 보고 서 있었다. 그는 이제 배고픔조차 느낄 ‘상상력’이 없어, 자신이 왜 서 있는지조차 모른 채 영원한 무(無)의 상태로 풍경의 일부가 되어갔다.


도시의 단말기들은 여전히 반짝이며 사람들의 화려한 거짓말을 먹고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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