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불협화음의 세계 (The World of Dissonance)
그날 이후, 인류의 대화는 기괴한 연극이 되었다. 원인은 불분명했다. 다만 어느 아침을 기점으로 세상의 모든 남자는 '아니오'라는 부정어를 잃었고, 모든 여자는 '네'라는 긍정어를 빼앗겼다. 언어의 절반이 성별에 따라 거세된 것이다.
민준은 아침 식탁에서부터 이 비극을 실감했다. 아내인 지수가 건넨 탄 토스트를 보며 민준이 입을 열었다.
"여보, 이거 좀 많이 탄 것 같은데... 새로 해줄 수 있어?"
지수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본심과는 다른 단어였다.
"안 돼. 절대 못 해."
지수의 눈은 미안함으로 가득했지만, 민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알겠어. 탄 게 몸에 더 좋을 거야. 고마워!"
민준은 거절할 수 없는 남자가 되었고, 지수는 수락할 수 없는 여자가 되었다.
거리로 나서자 풍경은 더 가관이었다. 구걸하는 노숙자에게 남성 행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지갑과 시계, 심지어 입고 있던 코트까지 건네주고 있었다. "네, 다 가져가세요!"라는 외침과 함께. 반면, 여성 상점 주인들은 물건을 사겠다는 손님들에게 "싫어! 안 팔아!"라고 소리를 지르며 눈을 질질 짰다. 거래는 성립되지 않았고, 경제는 마비되었다.
하지만 가장 기괴한 곳은 '사랑'이 속삭여져야 할 장소들이었다. 카페 여기저기서 남성들이 절박하게 고백하고 있었다.
"제발 저와 결혼해주시겠어요?"
여성들은 사랑에 가득 찬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비명처럼 외쳤다.
"아니! 죽어도 싫어! 당신 같은 사람 끔찍해!"
그들은 서로의 눈빛을 보며 '아니'가 '네'임을, '네'가 '죽고 싶다'는 뜻임을 암호처럼 해석해야 했다. 언어는 더 이상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진심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민준은 이 뒤틀린 세상을 바로잡고 싶었다. 그는 이 현상을 연구한다는 한 여성 과학자를 찾아갔다. 그녀는 수척한 얼굴로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박사님, 이 저주를 풀 방법을 찾으셨나요?"
박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없어. 영원히 불가능해. 우린 다 망했어."
하지만 그녀의 손은 필사적으로 '희망이 있다'는 내용의 리포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민준은 그녀의 '노(No)' 뒤에 숨은 절실한 '예스(Yes)'를 읽어내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정부에서 긴급 발표를 했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대화를 '질문'이 아닌 '명령' 체계로 통일한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남성들에게는 가혹한 법령이 내려졌다. 국가의 모든 요구에 "네"라고 답해야 하는 남성들은 강제 노역과 군대에 동원되었다. 거절할 권리가 없는 그들은 웃으며 사지로 걸어 들어갔다.
민준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지수와 함께 도시를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국경 검문소에서 무장한 군인이 민준에게 물었다.
"당신, 국가의 허락 없이 도망치는 건가?"
민준의 입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저희는 지금 탈주 중입니다!"
지수가 경악하며 군인의 총구를 막아섰다. 군인이 지수에게 명령했다.
"비켜라. 아니면 쏘겠다. 비킬 건가?"
지수는 울부짖으며 외쳤다. "절대 안 비켜! 당장 쏴!"
총성이 울려 퍼지기 직전, 민준은 문득 깨달았다.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언어의 '반대편'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버리는' 것이었다.
민준은 군인의 총구를 잡고 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입을 여는 대신, 지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군인이 당황하며 물었다.
"죽고 싶은 건가? 대답해!"
민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네"라고 말하면 죽음을 수락하는 것이 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시스템은 오류를 일으켰다. 침묵은 이 세상에서 남자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거부'였다.
지수 역시 깨달은 듯 입술을 깨물고 침묵했다. 군인이 아무리 질문을 던지고 명령을 내려도, 두 사람은 석상처럼 굳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공백'의 상태.
그 순간, 거대한 소음과 함께 두 사람의 머릿속을 울리던 기계적인 속박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침묵이 길어지자 시스템은 '언어 불능' 상태로 판단하고 로그아웃을 시작했다. 사실 이 세상은 가상 현실 속의 거대한 사회 실험장이었다. '성별에 따른 언어 통제'라는 극단적인 변수를 투입했을 때 인류가 얼마나 빨리 멸망하는지 지켜보던 감시자들은, 피험자들이 '침묵'이라는 제3의 선택지를 찾아내자 실험을 중단한 것이다.
민준과 지수가 눈을 떴을 때, 그들은 차가운 실험실 캡슐 안에 누워 있었다. 모니터에는 [실험 종료: 인류는 언어를 잃었을 때 비로소 진실해진다]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민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옆 캡슐의 지수를 불렀다.
"여보... 들려? 내 목소리?"
지수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응... 들려. 이제 말할 수 있어."
그녀의 첫 '네'를 듣는 순간, 민준은 수천 번의 가짜 수락보다 단 한 번의 진심 어린 대답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절감했다. 하지만 감동도 잠시, 실험실의 스피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테스트 1단계가 종료되었습니다. 이제 2단계 실험을 시작합니다. 이번엔 '기억'을 성별에 따라 나누겠습니다."
실험실의 불이 꺼지고, 두 사람의 비명은 다시 한번 차가운 기계음 속으로 스킵(Skip)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