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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Kim Sep 10. 2018

행복스위치

남편이 변했다.

매일같이 술에 쩔어 늦게 들어오고, 걸핏하면 트집에 화부터 내던 인간이었다. 주말에는 소파에 누워 밥 먹을 때 빼곤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애들이랑 좀 놀아주라고 하면, 5분도 못 놀고 잔소리만 하던 남자였다. 그래서 애들도 아빠를 슬슬 피하기 시작한 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그러던 인간이 갑자기 변했다.


여느 때와 같이 출근을 하고 늦게 퇴근하는 날이었다. 들어오는 남편의 얼굴이 싱글벙글이다. 웬일인가 싶다가 공짜술이라도 얻어먹었나 보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갑자기 이 인간이 방으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끌어안는다. "여보 마누라 늦어서 미안. 오늘도 고생 많았지?" "아유.. 취했어요? 왜 안 하던 소릴 하고 그래요?" 남편은 이내 싱글벙글 웃으며 옷을 벗는다. "당신 어머님 집에 청소기 사드리고 싶다고 했잖아. 그거 얼른 사드려. 그리고 일요일에 애들 데리고 놀러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우리 집에는 생전 뭐하나 사보내는 법이 없던 인간이 왜 그런지 어리둥절하다. "아니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요? 진짜 나 사서 보내요?" 남편은 "어어 그럼 진짜지~"라고 웃으며 말하곤, 애들 방으로 들어간다. 자고 있는 애들 얼굴을 턱수염으로 부비적 거리며 진하게 뽀뽀를 하고 나온다. 아무래도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있었나보다.  


주말 아침, 밥을 먹으며 남편이 연신 맛있다는 칭찬을 한다. 생전 맛있다고 한 적이 없던 음식들인데 어젯밤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 아이들한테도 어제 유치원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정하게 물어보며 대화를 시도한다. 아이들도 갑자기 변한 아빠가 이상한지 눈만 동그랗게 뜨고 대답을 못한다. "여보, 오늘 날도 좋은데 우리 가족들끼리 나들이라도 나갔다 올까?" 남편의 뜻밖의 제안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갑자기 왜 그러냐고 따지듯 물었다. "내가 뭘, 나야 늘 이렇지..."라는 대답에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남편은 결국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집에 들어오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웬 꼬마 아이가 하나 서있더라고. 이 밤에 웬 꼬마가 혼자 서있나 궁금해서 지나가는 길에 엄마는 어디 가셨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이 꼬마가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하고 생글생글 웃기만 하고 있는 거야. 근데 그 웃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그래서 다시 한번 너 여기 사니?라고 물었는데, 또 대답 없이 환하게 웃기만 하는 거야. 참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려려니 지나가는데, 이 꼬마가 갑자기 아저씨 이거 가지고 가세요. 이거 아저씨한테 필요할 거 같아서요 라고 말하면서 조그만 스위치를 하나 주더라고. on/off를 할 수 있는 작은 스위치였어. 이게 뭔데 아저씨한테 주냐고 물었더니 그 꼬마는 저리로 뛰어가며, 그거 행복 스위치예요 라고 소리치며 사라졌어. 이상하지? 별 싱거운 녀석도 있네 라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탔지. 근데 이상하게 그 스위치를 한 번 켜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주머니에 들어있는 그 스위치를 꺼내지도 않고 손을 더듬어 켰지! 그랬더니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 해지면서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더라고."


"진우 아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 꼬마는 누구고, 스위치는 또 뭐라고요? 이 양반이 술이 덜 깼나?"


"아냐, 그리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더라고, 그리고 문을 열고 당신 얼굴을 보는데 알수 없는 감정이 밀려오면서 고마운 생각이 들었어. 내가 당신 고생만 시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 애들 얼굴도 보고 싶고, 그동안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이 너무 후회도 되고... 그동안 미안했오 여보. 진우야 상우야 너희들한테도 아빠가 너무 무심했지? 우리 밥 먹고 요 앞 공원에 놀러 나가자! 아빠가 신나게 놀아줄게!"


"아빠 진짜예요?? 오예~ 나이스~ 대박 대박!!" 진우랑 상우는 놀러 나가자는 아빠의 말에 벌써부터 야단법석이다. 아직도 남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변한 남편의 모습이 싫지 않다.

밥을 먹고 남편이 축구공과 캐치볼을 챙겨 아이들과 나갔다. 정신없던 집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빨래를 돌려놓고 설거지와 청소를 하려고 빨래 바구니에 세탁물을 세탁기에 쏟았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 주머니에서 뭔가가 굴러 떨어졌다. 주워서 보니 작은 스위치였다. 설마 남편이 말한 게 사실이었나? 스위치는 on을 향해 켜져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스위치 on의 반대쪽에도 off가 아닌 on이 쓰여있었다. 스위치를 어느 방향으로 해도 모두 on이 되는 이상한 스위치였다. 호기심에 스위치를 반대쪽 on을 향해 켰다. 그 즉시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 해져 온 몸이 휘청였다. 간신히 몸을 가누고 베란다 창문을 붙드는데, 공원에서 열심히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남편이 보인다. 저질 체력이라 벌써 헥헥 거리는 게 멀리서도 보이는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정겹다. 술접대로 간이 망가져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는 남편한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맨날 큰소리만 치고, 잔소리 하고, 자기도 한다고 하는걸 텐데.... 올라오면 돈 벌어 오느냐고 고생 많다고 등이라도 토닥여줘야지. 그리고 오늘 저녁은 남편이 좋아하는 닭도리탕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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