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기
추간판 탈출증. 일명 허리디스크. 의사가 내게 내린 진단명이었다. 의사는 MRI사진의 척추 뼈를 위에서 아래로 짚으며 하나씩 숫자를 붙여갔는데, 의사의 손가락이 네 번째 척추뼈에 도달할 즈음 그 척추의 모습이 앞 번호의 척추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란 걸 알 수 있었다.
4번과 5번의 척추 뼈는 이미 디스크에 이르렀고, 특히 4번은 그 돌출정도가 심해 시술이 시급한 상황이라는 소견을 내렸다. 나는 일순간 하얀색 페인트통을 뒤집어 쓴 사람처럼 아무런 말과 행동을 할 수 없었는데, 의사는 그런 나와는 달리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능숙히 내가 해야 할 다음 행동을 빠르게 유도해갔다.
나는 의사의 권유로 척추주사를 맞게 되었는데, 주사는 두 번 다시 맞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팠다는 걸 제외하고는 효과가 꽤나 괜찮았고, 시술 후 향후 치료 일정을 간략히 들으며 터덜터덜하게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몸이든 마음이든, 한 순간 무너져 내리기 이전에는 반드시 전조증상이 찾아온다. 다만 대부분은 아직 견딜만하기에, 크게 신경 쓸 정도가 아니기에, 혹은 감각이 무딘 성향이라서 가벼이 넘기며 일상에 묻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일상에 지치고 치인다는 핑계로 자연스레 뚱뚱한 캔맥주 뚜껑을 당기는 저녁이 많았다. 해방된 시간의 보상이라 여겼는데, 돌이켜보니 그 혼술의 자유만큼이나 스스로를 돌보고 살피는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비록 '나'라는 존재는 규율이 빽빽이 가득한 무리 속에 살며, 타인의 기대와 눈치를 먹고 살아가는 아주 작은 숨이지만, 한편으론 이런 숨이 살아있기에 세상 또한 존재하는 것일 테니 나는 이제라도 조금씩 나를 돌보기로 마음 먹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지만, 오늘만큼은 따뜻하게 데운 차 한 잔을 나에게 들고 가 건네고 싶다. 가능하다면 약간의 낯간지러움이 묻은 사과와 용기의 말도 함께 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