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 오펜하이머
이 영화를 IMAX 상영관에서 보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원자폭탄이 폭파되는 순간, 3km 이상 하늘로 치솟는 화염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었다. 전쟁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폭발 실험 장면을 영화는 어떻게 재현했을지 궁금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깨달은 바가 있었다. 원자폭탄을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보거나, 인류의 놀라운 과학적 성과로만 보는 좁은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을 지닌 폭탄이 인류와 인간 문명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평화추구라는 정의 실현, 2차 세계 대전의 종결, 희생당하는 무고한 인류의 구원이란 대의명분으로 원자폭탄을 대했다고 하는 것이 맞다. 긍정적 측면에만 생각이 몰두되어 부정적 영향에 대해 외면하는 자세를 취한 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폭발의 결과가 초래한 물리적 참사인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을 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고 치부했다. 추가적 희생이 있더라도 전쟁을 종료시키는 길이 옳다고 보았고 공리주의적 희생을 불가피한 수순으로만 여겼다.
또한 정치적 참사인 세계 대전 종식 이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대립이 만든 이념 양분 구도를 누가 예상했을까? 냉전 체제하에서 군비 경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원자폭탄이 만들어질지 누가 알았을까? 그런 세상이 올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일반인이라면 알 수 없는 참사였다. 변명을 하자면 이런 이유가 원자폭탄을 바라보는 데 있어 편견이 되었고, 원자폭탄을 합리적으로 고민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염이 치솟고 버섯모양의 구름이 피어오르는 순간을 포착한 장면은 IMAX화면을 고집하며 극장과 시간을 선택한 보상 같았다. 무엇보다 그 순간의 상황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경험하게 만들기 위해서 감독이 얼마나 디테일에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폭발 순간을 번개와 천둥처럼 시차를 두고 경험하게 만들었다. 마치 앞으로 전개될 오펜하이머의 이야기에 후폭풍이 밀어닥칠 것이란 복선처럼 느껴진 지점이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할 때, 역사적 사실의 재현으로 지식을 전달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원자폭탄을 만드는 과정에서 오펜하이머가 겪었던 깊은 고뇌, 혼란스러운 감정, 폭탄의 위력 등을 관객들도 유사하게 체험하기를 원했다. 역사적 사실을 단편적으로 보기보다, 입체적으로 봐주기를 바랐다. 핵문제는 지금도 전 세계적인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진행 중인 중요한 국가 안보의 주제이다. 따라서 원자폭탄과 관련된 모든 이슈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 순간부터 되짚어 보는 과정은 의미 있는 일이다.
오펜하이머는 당시 분야별 유명 과학자를 설득하며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권유했다. 그때부터 고민을 시작했다. 그의 번뇌는 물리학이란 순수 과학에 불명예를 씌운다 생각에서 출발했다. 불가피한 희생과 원자폭탄 제조법을 개발하려는 국가 간 경쟁도 예상했다. 심지어 원자폭탄의 보유가 국가 간의 권력 구조를 재편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는 것도 예측했다. 모르면 생각하지 않았을 문제까지 끌어안고 사느라 잠 못 드는 나날을 보냈다.
그의 고민은 우려로 끝나지 않았다. 대부분 현실적 문제로 전환되었고 그 자신도 그 문제에 휩쓸렸다. 물리학의 명예가 실추되듯, 그의 명예도 그랬다. 냉전체제의 경쟁에서 그의 정치적 신념이 도마에 올라 스파이 행위로 의심을 받았다. TIME지의 모델로 세계인의 관심과 존경을 받던 인물이 반애국주의자로 취급당하는 상태까지 추락했다. 개인사의 공개로 인한 가정의 위기, 성공을 향한 집념이 깨뜨린 동료애, 우정을 가장한 친구의 기만과 배신 등 인간적인 관계의 파탄까지 이어졌다. 그 모든 순간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마치 원자폭탄의 개발이 유죄로 판결 나서, 그가 형벌을 받아야 했던 것처럼 가혹했다.
전쟁 억제력이 도를 넘어선 현 상황에서 여전히 파워를 내려놓지 못하는 보유국의 행태를 보면서 원자폭탄의 개발에 대해 처음으로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핵을 보유한 선진국의 정치가 얼마나 유치한 논리로 힘겨루기를 하는지 개탄스러웠다.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이 여기까지 치닫게 될지 몰랐다. 감독이 의도한 바라면, 그의 연출력에 감탄하고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미리 내다본 것처럼, 아인쉬타인이 마지막 장면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잔상처럼 오래도록 남았다. 어쩌면 그의 말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에게는 화두가 되었고, 이 영화를 구상하는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