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by 책 읽는 소방관

아래 글은 내가 몇 년 전, 결혼을 앞두고 어머니께 쓴 편지다. 기억을 위해 여기 적어놓는다.




Dear J여사님

모친. 아들입니다. 영영 안 올 것 같던 이런 날도, 결국에는 왔군요. 37살, 이제 장가가려 합니다. 37년. 짧지는 않은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전혀 기억나지 않는 갓난쟁이 때부터,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어찌어찌해서 대학에 들어갔고, 남들 다 간다는 군대 별 일이야 있겠나 싶어 가벼이 생각하고 입대했지만, 지나고 돌아보니 2년 남짓한 그 기간을 별 일 없이 건강하게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요.

그 후로 그럭저럭 대학생활을 마치고 교직에서 뜻을 찾아보려 했지만 무엇보다도 시험이 안 되니 답이 있었나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임용시험 재수를 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설령 재수를 했다 하더라도 시험에 반드시 합격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 합격했다 하더라도 그 후 생활이 지금보다 더욱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재수하는 것 대신, 차라리 G여고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는지도 몰라요.

대략 4년간의 기간제 교사 생활 중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무서운지, 그것 때문에 모친이 얼마나 고생했었는지 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두 자식을 길러내는 데 당신의 모든 삶을 그대로 바쳐온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때를 즈음해서 모친 어깨도 그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그게 너무나도 뿌듯하고 좋았어요.

그 학교에서 잘 풀렸다면 지금 내 모습이 어땠을는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학교는 날 원하지 않았고 나도 호기롭게 그곳을 박차고 나왔죠. 그 뒤로는 지금 보이는 대로입니다. 대학을 마치고도 3년이라는 시간을 더 들여 대학원 공부를 했고, 그래도 이제는 어디 가면 ‘변호사’라는 말이 내 이름보다 먼저 나오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이 모든 기간 동안 모친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나를 위해 내 동생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는지, 때로는 자식들에게 마음의 상처받으며 눈물 흘려야 했는지 내가 전부 다 알고 있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노력과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지난 시간, 힘든 시기도 많았죠.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좋아져 왔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보다는 조금 더 좋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삶이라는 것이 항상 꽃길만 걸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하는 순간이 오겠지요. 그때가 온다면, 우리 가족 조금 더 서로를 배려하고 지혜롭게 그 순간을 이겨냈으면 합니다. 길게 봐도 오륙십 년 안에 우리 모두 한 줌 흙으로 스러져 사라져 버릴 운명이라면, 그 짧은 기간만이라도 우리 가족끼리 더 아끼고 사랑하며 지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그런 가족의 한 사람으로 H를 받아들이려 해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내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가족입니다. H는 나를 많이 믿고 나를 사랑하고, 나 역시도 그렇습니다. 내가 택한 내 평생의 반려자가 아프거나 상처받지 않도록 평생을 아끼고 노력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런 내 결정을 모친이 응원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만큼, 나의 반려자를 예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모친의 아들이 택한 행복이니까요.

나도 H도 모친의 뜻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배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만 우리 모두는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니, 때로는 모친의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이 올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그런 어려움을 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들도 더욱 노력할게요.

37년 동안 낳고 기르느라 애쓰신 당신의 노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어머니.


20XX. 9. 28.
아들 C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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