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관측 능력의 확장을 통해 본 과학기술 진보의 궤적
1. 들어가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매일같이 쏟아지는 기술 혁신의 소식들 속에서 과학기술이 전례 없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고 느낀다. 스마트폰, 인공지능, 우주 탐사, 유전자 편집 등 한 세대 전만 해도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주관적 인상과는 달리 실제로는 둔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학기술 발전'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어떻게 정량화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과학기술의 수준을 하나의 수치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단순화된 접근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발전의 궤적을 추적해 보려는 시도는 분명 가치가 있다.
2. 과학 발전 정량화의 다양한 시도들
과학기술 발전을 측정하려는 시도는 여러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법은 특허 출원 수, 연구개발(R&D) 투자 규모, 학술 논문 출간 수와 인용지수 등을 활용하는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런 지표들을 결합하여 종합적인 기술진보 지수를 만들기도 했으며, 무어의 법칙처럼 특정 기술 영역의 발전 패턴을 정량화하는 사례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질적 혁신을 수치로 표현하기 어렵고, 기술 간 상호작용 효과를 측정하기 복잡하며, 사회적 영향까지 고려하면 더욱 복잡해진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지표들이 과학 활동의 '투입량'은 잘 보여주지만, 실제 '성과'나 '영향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3. 새로운 관점: 관측 능력의 확장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보다 직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접근법을 제안해 볼 수 있다. 바로 인류의 '관측 능력'의 확장을 통해 과학 발전을 추적하는 것이다. 관측 범위의 확장은 곧 과학적 세계관의 확장과 직결되며, 이는 과학 발전의 본질을 반영한다.
가. 거시 세계로의 확장: 우주 관측의 역사
천체 관측의 역사를 통해 인류가 관측 가능한 우주의 범위가 어떻게 확장되어 왔는지 살펴보자.
고대 인류는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별들, 즉 수천 광년 거리의 천체들만을 알고 있었다. 1600년대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목성의 위성, 토성의 고리 등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허블이 안드로메다 은하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여 250만 광년이라는 거대한 스케일을 인류 지식에 추가했다.
현재 인류는 약 940억 광년에 이르는 관측 가능한 우주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가장 멀리 관측된 천체는 약 470억 광년 떨어져 있다. 이 데이터를 로그 스케일로 그래프 화하면 특히 20세기 이후 급격한 가속을 보여준다.
나. 미시 세계로의 확장: 원자 관측의 발전
반대 방향으로, 미시 세계에서의 관측 능력 발전도 마찬가지로 극적이다.
1665년 로버트 훅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한 것이 시작이었다면, 1800년대에는 광학현미경이 약 200nm의 한계에 도달했다. 1930년대 전자현미경의 개발로 나노미터 수준의 관찰이 가능해졌고, 1981년 주사터널링현미경(STM)의 개발로 드디어 개별 원자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수차보정 전자현미경으로 피코미터 스케일의 측정이 일반화되었다.
이렇듯 거시와 미시 양 방향으로의 관측 능력 확장은 과학기술이 물리적 세계의 경계를 어떻게 확장해 왔는지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4. 발견되는 패턴과 그 의미
이런 식으로 인류의 관측 능력 확장을 도식화하면 몇 가지 흥미로운 패턴이 드러난다.
첫째, 두 영역 모두에서 20세기 이후 관측 범위가 지수적으로 확장되었다. 둘째, 특정 기술 혁신(망원경, 전자현미경, CCD 등)이 있을 때마다 급격한 도약이 일어났다. 셋째, 각 기술에는 물리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최근 들어 이런 확장의 속도에 둔화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 역시 기대에 비해 획기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지는 못했고, 원자 관측 분야 또한 STM 이후 새로운 획기적 도약은 아직 관측되지 않았다.
5. 연구 생산성의 감소
이런 관찰은 경제학자 Nicholas Bloom과 Charles Jones 등이 수행한 "Are Ideas Getting Harder to Find?" 연구 결과와 놀랍도록 일치한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1970년대 이후 연구 생산성이 상당히 극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현재 트랜지스터 수를 두 배로 늘리는 데 필요한 자원이 당시보다 18배나 많이 든다. 더 놀라운 것은 미국 경제 전체의 연구 생산성이 1930년대 이후 41분의 1로 감소했다는 점이다.
Nature에 발표된 최근 연구에서도 지난 60년간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논문과 특허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덜 파괴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기존 지식을 완전히 뒤바꾸는 혁신보다는 점진적 개선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다.
이 모든 지표들은 과학기술 발전이 단순히 더 많은 데이터를 쌓는 문제가 아니라, 점점 더 어려운 질문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6.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연구자들은 몇 가지 원인을 제시한다. 첫째, 'Low-hanging fruit' 효과다. 쉬운 발견들은 이미 다 끝났고, 이제는 더 어려운 문제들만 남았다는 것이다. 둘째, 연구 규모의 비효율성이다. 연구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지만, 조정과 소통 비용도 함께 증가했다. 셋째, 관료화와 제도적 경직성으로 인해 연구 환경의 복잡성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7. 맺으며: 가속도의 역설
수학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현재 데이터들은 과학기술 발전의 '속도'(1차 미분)는 여전히 양수지만, '가속도'(2차 미분)는 음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발전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상에서 체감하는 변화의 속도감과는 다소 상반된 결과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기술의 소식을 접하며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근본적인 혁신의 빈도는 줄어들고 있을 수 있다. 스마트폰의 성능 향상이나 인공지능의 발전도 자세히 보면 기존 기술의 점진적 개선에 가까울 수 있다.
물론 이런 분석에도 한계가 있다. 측정 방법의 한계나 새로운 연구 패러다임의 등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고, 아직 그 영향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려운 혁신들이 있을 수도 있다. 특히 AI, 양자컴퓨팅, 합성생물학 등의 분야에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관측 능력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본 과학 발전의 궤적은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결코 자동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며, 그 속도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류의 선택과 노력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둔화 현상이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의 전조인지는 앞으로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