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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 Dec 11. 2020

나의 장업계

화장품 제조사에서의 9년이 나에게 남겨준 것

사회가 정해 놓은 대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교육해 온 대로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남들과 똑같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했다. 나는 당연히 남들이 모두 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에 취업을 원했다. 원서를 낼 대기업을 찾아보았을 때 다양한 회사들이 있었다. 금융권, 식품업계, 유통업, 화학/철강, 조선업 등등. 하지만 나는 내가 관심이 있는 업계가 아니면 회사 생활이 즐겁지 않을 것 같았고 나는 장업계(화장품 업계) 취업을 고집했다. 가장 원하던 회사는 아모레퍼시픽과 CJ 올리브영이었고 운 좋게도 나는 서류합격부터 1차, 2차 면접까지 순탄하게 대부분의 과정을 거쳤으나 최종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 최종 면접에서 탈락을 했을 때는 서류 전형에서 떨어졌을 때보다 훨씬 더 억울했고, 나는 분해서 눈물을 흘렸었다. 다음 채용 시즌까지 기다려서 또 이 모든 과정을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빠졌고, 나는 결국 대기업에서 눈을 낮추어 다른 곳을 알아 보았다. 그렇게 나는 한 화장품 제조업체에 서류를 냈고 단번에 면접에 합격해 취업을 하게 되었다.


아직도 출근 첫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첫 출근은 공장이었다. 도심에서 벗어난 외곽에 대중교통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교육을 담당하던 인사 팀장님께서는 나에게 초록색과 옥색이 촌스럽게 어우러진 공장 옷을 주며 입으라고 했다. 사회가 가르친 대로 나는 그 당시에는 대기업이 아닌 회사에 취업했다는 것이 부끄러워 주변에 취업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연봉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서 머지않아 다른 대기업으로 이직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난 그 회사에 취업하여 6년 반을 다녔다.


일반 소비자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제조사의 존재. 나는 모든 화장품 회사는 자체 연구개발 시설이 있고 생산도 직접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수많은 브랜드들의 뒤에는 거대한 제조사가 있었다. 브랜드가 기획, 마케팅, 영업 및 판매를 한다면, 그 앞단에 필요한 제품이 만들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제조사에서 진행된다. 화장품 시장의 황금기였던 2010년대, 그 당시 화장품 시장에서 원브랜드샵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제조사도 덩달아 몸집을 키울 수 있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화장품 회사인 AP와 LG를 제외한 대부분의 브랜드들은 제조 시설이 없었으므로, 브랜드사와 제조사는 서로 상부상조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제조사는 ODM 능력을 강화하면서 서비스를 차별화하기 시작했다. 단순 제품을 의뢰받아 연구하고 생산을 해주는 역할에서 벗어나, 다양한 기술을 적용한 새로운 제형을 개발하고 또 역으로 그런 신기술 신제형들을 브랜드사에 제안했다. 나는 화장품 시장 현황과 트렌드 분석을 통해 새로운 제형과 컨셉을 개발했고, 고객(브랜드사)에 각 브랜드의 컨셉이나 라인에 맞게 적합한 제형, 컨셉, 원료 등을 제안했다. 장업계에는 늘 브랜드사는 ‘갑’이고 제조사는 ‘을’이라는 말이 있어왔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을’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시장에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나 그리고 내가 있는 제조사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BB크림의 뒤를 이었던 CC크림, 더마코스메틱, 비건화장품 등은 브랜드가 아닌 제조사에서 트렌드를 주도한 제품들이다.


장업계에 들어와서 제조사에 몸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늘 옆에 있었고, 제형 기술에 가장 중요한 원료사와 밀접하게 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BB크림부터 시작해서 쿠션파운데이션까지 전 세계를 K-뷰티가 주도했던 황금기는 나에게 더욱더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줬다. 그렇게 조금씩 경력을 쌓아 가면서 회사에서 나름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다양한 시장과 제품을 체험할 수 있었다. 중국과 일본은 셀 수도 없이 많이 다녀왔고, 이태리, 프랑스, 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까지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9년이 흘렀고 나는 화장품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유명한 제조사 두 곳을 경험하고 퇴사를 했다. 비록 처음에는 이름 없는 중소기업이라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을 했던 내 자신이 더 부끄럽다. 장업계에 들어와서 제조사에서 보낸 9년이라는 시간 동안 배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엄청난 자양분이 되었고, 먼 훗날 나의 브랜드를 만든다면 꼭 진정성이 있는 브랜드가 되어 진정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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