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일기04) 일을 그만두고 비로소 보인 것들

정체성을 잃어버린 나, 글을 적기 시작하다

by 마음 읽는 엄마

단순히 일을 줄이고 휴식 시간을 늘리면 번아웃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일을 그만두고 나니 내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커져만 갔다.


사실 처음부터 일을 그만둘 생각은 아니었다. 업무량이 벅차 회사에 일을 줄여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은 “부분 조정은 어렵고 다른 프리랜서를 구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내가 말한 지 몇 주가 지난 뒤, 내가 다시 물어서야 들은 답이었다. 육아휴직 전부터 오래 정직원으로 일했던 곳이라 더 충격이 컸다. 갑자기 ‘교체 가능한 부품’이 된 것 같은 기분. 아이를 낳고 처음 느껴본 사회적 소외감이 밀려왔다.

휴식 시간이 많아졌지만, 마음속은 더 텅 빈 느낌뿐이었다. 쉬고 있어도 온전히 쉬는 것 같지 않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멍한 상태. 내 존재를 보여주던 역할 하나가 사라지니, 마치 나라는 사람이 가치 없이 버려진 것 같았다.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나는 급하게 집 근처 레스토랑에 파트타임 알바 이력서를 넣어보았다. 다음날 면접을 보러 갔지만, 면접관의 첫 질문에 ‘망함‘을 직감할 수 있었다.

“결혼 하셨어요?“

그리고 다음 질문들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이가 몇개월이에요?“

“아직 아이가 어린데 왜 일을 하려고 하세요?”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이의 조부모가 멀리 살고 있기에, 아이가 아플 땐 남편이 연차를 쓰면 된다고 대답하면서도 내 마음속에선 ‘이게 맞나?’하는 의심이 들었다. 파트타임 알바로 몇 푼이나 벌겠다고 남편이 연차를 쓰는 상황을 만드는 게 맞나?

예상된 질문에 예상된 결과, 알바 면접에서 탈락했고 그 뒤로 우울감은 더욱 극심해졌다.

이 이야기를 상담사에게 하니, 이 사건을 시작으로 마음 일기를 써보라고 권유받았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길 때마다 아래 양식에 맞춰 그 상황에 자동적으로 떠올랐던 생각과 마음을 적어보라는 것이었다.


마음 일기

상황: 면접에서 “결혼 하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음

자동적 사고: 아이가 있다고 하면 안 뽑힐 것 같다.

마음: 위축, 자존심 상함

행동: 면접관의 질문에 변명하듯 대답했다.


종이에 적어보니 머릿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생각들이 또렷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면접 생각으로 꽉 차 있던 머릿속이 조금은 비워졌다. 쓰기 전에는 부글부글 끓던 감정이었지만, 쓰고 나니 다 식어버려 다시 떠올려도 나를 흔들지 못했다. 글 쓰기를 귀찮아하던 나였지만, 감정을 글로 정리하는 일이 이렇게 효과적이라는 걸 처음 실감했다.


그 뒤로는 아이나 남편과의 갈등이 있거나, 마음에 남는 일이 생길 때마다 감정 일기를 부지런히 적었다. 감정 일기를 부지런히 적으면 과거의 감정도 정리되는 것은 물론, 다음날 육아도 수월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에게 화가 나는 날은 생겼다.

아이에게 화를 낸 날이면, 상담을 받아도 왜 나는 또 화를 냈을까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었다.

‘나의 예민한 기질을 바꿀 방법은 없을까?’ 하는 답답함도 뒤따른다.

그러나 상담사는 이렇게 말한다.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타고난 기질은 쉽게 변하지 않아요. 대신, 어떤 포인트가 트리거가 되는지 살펴보세요.”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금까지 내가 감정 일기에 주로 적은 감정은 ‘불쾌, 짜증, 답답’.

이 감정들이 어떤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올라오는지, 앞으로는 더 꼼꼼히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 일기를 쓰지 않아도 명료하게 보이는 날이 있고, 생각만으로는 뒤죽박죽인 날도 있었다. 특히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때는, 마주하기가 두려워 일기를 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감정을 외면한 날들은 여지없이 감정이 폭발하는 날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나는 감정을 밀어붙이며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한 번 멈춰서 적어 내려가야 다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감정 일기는 기적처럼 나를 완전히 바꿔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내가 어디서 흔들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등불이 되어준다는 것을.


그리고 그 등불 하나만으로도, 다음 날의 나를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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