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오전 열 시, 첫 책의 기억

타인이라는 책을 읽는 시간

by Readraw

립 책방에서

서 모임하며

립 출판한 이야기

“책을 읽는 자리에서 출발해, 쓰기와 그리기, 출판과 전시로 이어진 여성작가 읽기 모임 기록입니다.”




출처 : 모임장 ‘앨콩’ sns


첫 모임은 이주혜 작가님 읽기입니다. 고요하고 꾸준한 읽기.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눠요.


2023년 10월 27일, 모임장 앨콩님의 SNS에 짧은 모집 글이 올라왔다. 수요일 오전 열 시. 시작과 중간 어디쯤에 잠시 멈춰 선 '수요일'이 주는 느슨한 균형과 이른 시간의 맑음이 겹쳐졌다.

#오전열시여성작가읽기모임


그날의 나는 독서 모임이 무엇을 하는 자리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신청 버튼을 눌렀다. 작은 책방에 발걸음을 옮기는 일엔 익숙했지만,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막연했다. 고요하고 꾸준한 읽기, 그 말의 의미가 궁금했다.


나는 읽는 사람들을 상상했다.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손길, 이야기를 나눌 때의 눈빛.

읽는 사람들은 말보다 먼저 귀를 내주고, 쉽게 단정하지 않은 법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 같았다.

그들의 취향과 태도, 그리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지 궁금증을 안고 갔다. 한편으론 내가 이 모임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렘과 걱정이 공존했다.


문을 열었다. 가을의 끝자락, 조금은 긴장한 마음을 감추려 얇은 카멜색 코트 깃을 여미고 갔었다. 책방 안에는 은은한 커피 향이 감돌았고, 테이블 위 따뜻한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환하게 환대해 주는 책방 지기 버찌의 “오셨어요!”라는 인사가 긴장을 녹여주었다.


모임장은 내 상상 속 인물처럼 맑은 눈에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이였다. 뒤이어 해사한 미소로 들어왔던 ㄱ. 낯선 이지만 어쩐지 눈길과 마음이 동시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처음 마주한 눈동자들은 수줍으면서도, 각자 안에 담긴 무언가를 꺼내 놓고 싶은 듯 반짝였다.


“00동에 사는 00입니다.”


누군가의 시작으로 우리는 지역과 이름이라는 최소한의 좌표를 나누며 서로를 확인했다. 그렇게 수요일 오전의 느슨한 연대가 시작되었다.



첫 책과 여러 질문

첫 책은 이주혜 작가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였다. 모임장과 책방 지기가 애정하는 작가의 책으로 시작된 만남은 자꾸만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소설 속 서늘함과 따뜻함, 여성으로 살아온 경험에서 비롯된 흔들림과 편견까지. 그날의 공기는 오래도록 각자의 삶 속으로 번져 들었고, 다음 모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특별한 말을 나눈 것도 아닌데 마음에 창작 스위치가 켜진 듯 노트북을 켜 글과 그리고 싶은 걸 메모했다. 당시 적었던 '그림 에세이 책 만들기' '책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이야기'는 아직 형태 없는 점토 덩어리처럼 막연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에 따뜻한 물이 차오르듯 일렁였고 육아와 팬데믹이라는 긴 터널 속에 멈춰 있던 창작이라는 기계가 비로소 기분 좋은 예열을 시작하는 듯했다.


하지만 설렘의 끝엔 늘 서늘한 되새김이 따라왔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가시를 돋게 하진 않았을까, 타인의 삶을 너무 성급히 요약해 버린 건 아닐까. 그런 자책 끝에 2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살아남은 질문들이 있다.



오래 남은 장면 하나, 질문 하나

2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한 장면이 있다. 소설 속 장면도, 모임의 장면도.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에서 주인공 세 여성의 낮술 장면. 매운탕 냄비가 보글거리고, 차가운 소주잔이 손에 닿으며 세 사람의 목소리가 서서히 도드라지던 순간. 그들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는 주변 남자들. 책을 읽을 당시 나는 자연스럽게 주인공들에게 이입했고 그들을 바라보던 시선이 불편했다.


그때 멤버 K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해맑게 웃는 얼굴로 가끔 서늘한 통찰을 보여준다.)



근데… 내가 식당에서 저런 여자들을 봤다면, 나라고 남자들처럼 안 쳐다봤을까요?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 그 경멸의 시선이 사실은 나로부터 출발했다는 깨달음. ‘나는 그들과 다를 거야.’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는 사실이, 뒤늦게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로, 누군가를 판단하려는 순간마다 식당의 소음과 매운탕 냄비의 김을 함께 떠올리게 되었다.


'보글보글 경쾌하게 끓는 매운탕과 손안에 차갑게 닿는 소주잔 같은 것들이 우리를 들뜨게 했고, 어느새 세 사람 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참 웃고 떠들다가 문득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넓은 홀에 가득 들어찬 손님들이 모두 우리를 보고 있었다. 비슷한 얼굴, 비슷한 옷차림의 남자들이 비슷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경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입을 다물자 식당 안이 조용해졌다. 어디선가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음에 이어질 말은 이미 들은 듯 선명했다. 쯧, 여편네들이 대낮부터 재수 없게. 수라 언니가 소주잔을 들고 외쳤다. 얘들아, 얼른 마시고 쌀 사러 가자! 집구석에서 밥이나 하려면 쌀부터 사야지! 미예가 깔깔 웃다가 벽에 뒤통수를 부딪혔다. 우리 셋의 소주잔이 맞닿으며 경쾌하게 쨍강거렸다. 남자들이 시선을 돌렸다.'
- 116쪽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 중 -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조용히 곁에 머무르고 쌓였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끝난 뒤, 침묵이 너무 길어지면 나는 손을 꼼지락거린다. 위로를 해야 할지,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순간들. 그리고 어서 결론 내리고 싶은 마음에 앞서 뱉는 말들.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때의 내가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얼마나 성급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109쪽


읽으며 우리가 된 사람들

109쪽 '그런 시간을 통과해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이 문장을 볼 때마다 지금의 우리가 떠오른다. 그때도 좋았고 지금은 더 좋은 문장.

이곳에 모두 열거할 수 없지만, 각자 나름의 지난한 시간을 보냈다. 때때로 눈물을 짓기도 하고 답답함에 한숨을 쉬기도 했다. 애써 티 내지 않으려 해도 그림자처럼 달고 온 슬픔을 숨길 수 없었다.

가만히 들어줌으로써 서로에게 더 기댈 수 있던 시간들.


스물여섯 달 동안 소설과 에세이, 국내외 문학을 함께 읽으며 책 이야기를 넘어 ‘사람과 삶’으로 흘러가는 시간들을 함께 했다. 만약 이 모임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혼자 좁은 시야와 오독, 오만 속에서 책을 읽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나는 책을 읽지만 사람을 오독하곤 한다. 다만 예전처럼 그 오독을 정답이라고 믿진 않는다.


이 모임에 대해 쓰는 일은 생각보다 조심스러웠다. 누군가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문장을 여러 번 고쳤다. 혹시라도 내가 남긴 글이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되는 마음에.

그러므로 이 글에서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부분도 있다.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을 훼손하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근사해 보이지 않도록. 그 경계에서 남은 말들만 여기에 남겨본다.



*사람 앞에서도 책 앞에서처럼 신중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