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면 만나고, 만나면 헤어질 수 있을까

읽는 존재에서 쓰는 존재로 나아가는 기록

by Readraw

립 책방에서

서 모임하며

립 출판한 이야기

“책을 읽는 자리에서 출발해, 쓰기와 그리기, 출판과 전시로 이어진 여성작가 읽기 모임 기록입니다.”



"아, 좀 무서워요."


보라색 스웨터를 입고, 학생처럼 커다란 백팩을 멘 소설가가 미소를 띠며 던진 첫마디에 모두가 조그맣게 웃었다. 그 미소는 단호한 문장 끝에 붙은 재치 있는 쉼표 같았다. 작가님 한마디에 긴장으로 팽팽하던 공간이 단숨에 녹아내렸다.


이 만남은 우리의 작은 용기와 기분 좋은 '설레발'에서 시작되었다. '여성작가 읽기 모임' 첫 만남 후, 멤버들이 이주혜 작가님을 태그 하며 소감을 올렸다. DM으로 답을 주시던 작가님은 "여성들이 함께하는 일에 지지가 되고 싶다"며 응원을 보내주셨고, 그 흐름은 결국 대전 끝자락 버찌책방까지 작가님을 모셔 오는 뜻밖의 여정으로 이어졌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이 막 출간된 터였다.

기꺼이 먼 길을 달려와 준 다정함에 우리 모두는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뺏겼다.


여전히 선명하게 남은 그날의 공기와 온도




북토크 그리고 김밥

작가님이 농담인 듯 건넨 첫마디와 함께 북토크가 시작되었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이라는 제목처럼, 북토크는 짧았지만 이야기는 영영 머물 듯한 기분이었다.

소설 속에는 정치적 역사와 모녀 서사, 그리고 개인이 겪은 아픔을 글쓰기로 치유해 가는 과정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오랫동안 여성 작가들의 언어를 우리말로 옮겨온 번역가답게, 더 넓고 깊은 세계로 안내했다.


작가님의 안내로 지도에 없던 길이 나타났다. 나는 그 길 위에서 에이드리언 리치와 비비안 고닉이라는 이름을 만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동안 여성 작가의 글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여성이라는 시선에 스스로 갇혀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이름들 앞에서 내가 그동안 '여성의 삶'을 얼마나 박제된 관념으로만 소비해 왔는지 깨달았다. 내가 정답이라고 믿었던 세계는 읽기 편한 페이지만 골라 읽은 편협한 요약본에 불과했다.

이 사실을 깨닫자 기분 좋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길 끝에서 만난 비비안 고닉 『사나운 애착』은 모녀 관계 지독한 사랑과 증오를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게 해 주었다. 뉴욕을 배경으로 지독한 엄마와 담담한 딸에 대한 이야기. 이 책은 단순한 독서를 넘어, 삶 속 가장 복잡한 관계를 해석하는 새로운 지도가 되어주었다.


"여성은 분열의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에 쓰는 거죠. 헛발질 같지만 헛발질은 아니에요."

"모녀 서사에 관해선 누군가는 써야만 하기도 해요. 『사나운 애착』의 비비안 고닉처럼요."


북토크가 끝난 뒤에도 참가자들의 질문은 빈틈없이 이어졌다. 질문들은 작품 해설에 머물지 않고, 삶과 기억에서 출발해 다시 책으로 되돌아왔다. 각자 삶에서 길어 올린 질문은 결국 '여성으로서 쓰는 삶'이라는 커다란 줄기로 모여 깊은 공명을 만들어냈다.


생존과 여성의 글쓰기라는 묵직한 대화가 오간 뒤에 마주한 건 은박지에 쌓인 김밥이었다. 방금까지 '분열'을 말하던 작가님과 단무지를 씹으며 웃는 이 생경한 다정함이라니. (응? 소설가와 김밥을?)

김밥을 오도독 씹으며 생각했다. 쓰는 삶이란 고결한 예술 활동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꾸역꾸역 김밥을 밀어 넣으며 다음 문장을 고민하는 비루하고도 질긴 반복이 아닐까라고.

그날은 1월, 한겨울이었다. 데워진 실내 공기 사이로 서린 설렘이 마치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부유했다. 기억은 정돈되지 않았지만, 그날 장면만큼은 오래 붙잡고 싶었다.








쓰면 만나고, 만나면 헤어진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을 읽고 난 뒤 한동안 소설이 남긴 자국이 선명했다. 소설 속 한 장면이 자꾸만 맴돌았다.

당시 북토크를 기다리며 혼자 끼적여 두었던 글과 그림을 찾아본다.


"저만치 떨어진 야산 쪽 옥상 난간에 한 여자가 걸터앉아 담배를 피운다. 아직 날이 환하고 집 안에 분명 다른 어른들도 있는데 여자는 무람없이 담배를 치운다. … 여자애와 눈이 마주친다. 여자가 빙그레 웃는다. 웃음 사이로 하얀 연기가 푸슬푸슬 피어오른다. 그것은 제비의 가슴 털처럼 부드럽고 따뜻해 보인다. 순간 여자는 커다란 제비로 변한다. - 281쪽 - "


제비 여인


이 장면이 너무 좋아 수십 번을 읽었다. 무람없이 담배를 피우다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커다란 제비로 변하는 여자. 그 장면이 내 안에서 자꾸 유영했다. 계속 주인공 시옷을 윤심을 제비를 그리고 책 속 장면과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장면 속을 걸어 다녔다. 나는 시옷(주인공)처럼 합창단을 한 적도, 그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하지도 않았지만, 읽는 동안만큼은 시옷이 되어 그곳에 존재했다.

책을 덮고도 시옷이 내 방 언저리를 서성였다. 연필을 깎아 윤곽을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시옷을 보내줄 수 있었다.

그리고 드로잉 노트에 남긴 메모.


"내 삶을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을까?"

내내 나를 미워하던 나 자신, 타인을 향한 서슬 퍼런 미움, 그리고 차마 들여다보지 못해 덧난 지난날들과 비로소 작별할 수 있을까.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주인공 '시옷' - 그림을 보고 작가님과 함께 웃었던 기억
시옷과 제비



나의 노트에 남겨둔 질문은 이제 개인을 위한 독백을 넘어, 우리가 함께 채워갈 다음 페이지를 예고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촘촘한 기억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기로 했다. 서툴고 투박할지언정 기꺼이 '나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읽는 존재에서 쓰는 존재로, 우리 다음 페이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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